매일신문

대구지하철 참사-뜨거웠던 취재 현장

대구지하철 참사는 기자들의 취재 과정에서의 에피소드도 적지 않았다.

사건 발생일인 지난달 18일 오전 10시쯤 본사 기자에게 제보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화재가 이날 9시53분 발생했으니 10분이 지나지 않은 시각. 당시 사고 1079호 지하철을 타고 중앙로역에서 내려 지상으로 올라왔는데 시커먼 연기가 솟길래 제보한다는 내용이었다.

사회1부 기자 2명과 사진부 기자 2명이 현장에 급파됐다.

사건 전말은 파악되지 않았지만 지하철역에서 불이 났으니 필시 심상치 않은 사태일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데스크는 물론이고 현장에 도착한 기자들조차 당시 중앙로역에서 어마어마한 참사가 빚어지고 있다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당시 화재 진압에 투입된 소방관들조차 그러했으니….

취재가 시작되고 시간이 흐르자, 사건은 '엄청난 무게'로 다가왔다.

악마의 혀처럼 날름대는 시커먼 연기로 중앙로 일대가 전쟁터처럼 변하는 동안, 기자들은 숨 턱턱 막히도록 뛰었다.

본사 사회1부의 전화도 초 단위로 울어댔다.

그렇게 낮 12시쯤 1판을 찍어냈지만, 사상자 수가 급격히 불어나고 있다는 기자들의 연락이 숨가쁘게 들어오면서 신문을 다시 제작(갱판)했다.

그러나 그것으로서 사고 당일 본사의 윤전기는 멈춰 설 수 없었다.

"사상자가 수십 아니 100명을 넘을 수도 있다"는 현장 소식이 속속 들어오면서 매일신문은 이날 오후 호외를 발행했다.

당시 사고 현장은 산소통을 맨 소방관들조차 접근하지 못할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런 가운데 사진부 김태형 기자가 과감히 역사 안 진입을 시도했다.

김 기자는 방독면도 없이 이날 낮 12시30분쯤 대구역을 통해 지하 3층 화재 현장까지 접근했다.

기자로서는 최초의 현장 접근이었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 김 기자의 앞길을 밝혀준 것은 휴대전화 액정모니터의 희미한 빛이었다.

신발바닥이 뜨거울 정도의 열기. 뼈대만 앙상히 남은 1080호 전동차의 내부엔 불길이 남아 있었다.

셔터를 누르던 김 기자에게도 '죽음의 공포감'이 엄습해 왔다.

순간 근처에 있던 소방관이 다급하게 외쳤다.

"죽고 싶냐? 진화작업이 시작되면 유독가스가 겉잡을 수 없으니 빨리 떠나라". 그래도 김 기자는 현장을 떠날 수 없었다.

결국 취재 도중 유독가스를 많이 마신 김 기자는 이날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촬영된 지하3층의 생생한 화재 현장은 매일신문 지면에 고스란히 실렸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제보도 있었다.

현장 훼손 및 사건 은폐.축소 시비가 한창이던 지난달 25일 본사에는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사고 다음날 중앙로역 안에서 인부들이 투입돼 유골 등 30~40포대 분을 수습했으며, 화원 구마고속도로 대구지선변 야적지에서 휘발유를 부어 태우고 묻었다"는 경악스런 내용이었다.

제보를 한 40대 남자는 자신이 그 일에 투입됐으며 일회용카메라로 현장을 찍어뒀는데 자신과 가족의 신변만 보호해 준다면 양심선언을 하고 사진도 제공하겠다고 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내용이었지만 0.00001%의 가능성이라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그와의 접촉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는 가족의 안전이 위협받을지 모른다며 사진 보여주기를 계속 주저했다.

2명의 기자가 하루 종일 따라다니며 설득했지만 허사였다.

결국 이틀에 걸친 주변 취재와 확인 결과 그의 말은 허위임이 드러났다.

그가 무슨 심사로 그런 거짓 제보를 했는지는 지금도 알 길이 없다.

이래저래 대구지하철 참사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김해용기자 kimhy@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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