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손숙칼럼

그해 여름에 나는 7살이었다.

3월에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영희야, 바둑아를 배우고 가슴에 달고 다니던 손수건을 막 땔려던 즈음 멀리서 며칠 쿵쿵 대포소리가 들리더니 전쟁이 터졌다고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살고있던 남쪽 까지는 아직 전쟁의 와중속으로 들어가진 않았지만 곧 낙동강이 공산군 수중으로 넘어갈것이라는 불길한 소문들이 들려오고 날마다 부상병들이 군용트럭에 실려 임시로 병원으로 접수된 학교로 몰려오는 바람에 우리는 학교도 가지 못하고 조기방학을 하고 말았다.

집집마다 비상식량을 준비하고 방공호를 파고 하루에도 몇번씩 피난가는 연습을 하곤 했었다.

이불 보따리랑 옷 보따리는 누가 이고, 아이들은 누가 책임을 지고 혹시라도 헤어지는 경우에는 어디서 어떻게 만나야 한다는 등 어른들은 매일 모여서 의논들을 하고 밤이면 모두 신발을 신은채 토막잠을 자곤 했었다.

다행히 우리가 살던곳 까지는 전쟁의 소용돌이가 미치지않아 끔찍한 일들은 모면했지만 대신 또 다른 기막힌 사연들이 줄줄이 터져 나왔다.

국군과 미군이 진격해 오면서 부녀자들이 화를 입는 일들이 생겨난것이다.

온갖 흉한 소문이 난무하고 어느집 며느리가 멀쩡한 대낮에 미군한테 당했다더라는 흉훙한 소문들이 떠돌자 할아버지는 서둘러 언니와 엄마를 먼 산속으로 피난을 보내셨다.

읍내에는 부상병, 피난민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부모 잃은 고아들은 거지가 되어 떠돌아 다녔다.

팔이 없어지고 다리가 몽땅 잘려나가고 두눈이 먼 부상병들. 그들이 군모를 벗으면 아직 새파란 소년들이라고 할머니는 통곡하셨다.

어린 마음에도 너무나 끔찍하고 무섭던 전쟁이었다.

손등에 동상으로 피가 철철 흐르던 고아원 아이들, 눈만 커다랗고 올챙이처럼 배가 터질듯 튀어 나와 있던( 영양실조 때문에 ) 다리밑의 거지 아이들-. 전쟁이 끝나도 그 후유증은 너무도 끔찍했고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어린 아이들은 미군차만 보이면 '기브미 초코렛'을 외치며 악착같이 따라붙곤 했던 기억들은 쓴 웃음을 짓게 한다.

얼마전의 아프카니스탄의 전쟁, 그리고 요즘의 아라크 침공을 보면서 나는 잠 못 이루고 뒤척일때가 많다.

말이 좋아 민간인은 다치지 않겠다고 하지만 그게 얼마나 빛좋은 개살구 인지 사람들은 안다.

머루알처럼 검고 커다란 눈이 잔뜩 겁에 질려있는 이라크 어린이들을 볼때마다 나는 하느님은 계시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된다.

2천400만 인구의 절반이 어린이란다.

그 아이들은 벌써 91년 걸프전 이후 단행된 경제 제재로 먹고 교육받을 기본적인 권리 조차 빼앗긴 어린이들이다.

이번에 또 전쟁이란 고통을 겪게 됐으니 그들이 받는 고통과 희생은 상상하고 남음이 있다.

경제제재 8년만에 어린이 50만명이 사망했다는 보고가 있다.

각급학교엔 종류를 불문한 일체의 문방구도 없고 의자나 책상도 없고 교과서 한권으로 반 전체가 공부를 하고있단다.

99년 이라크를 방문한 어느 단체는 "이라크 어린이 한세대 전체가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다" 고 밝혔다.

이 엄청난 비극을 우리는 그저 전쟁 영화 보듯이 때로는 즐기면서 강건너 불구경 하듯 하고있다.

때로는 개 한마리가 죽어도 난리를 치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저지르고 있는 이 엄청난 전쟁을 속수무책 보고만 있어야 한다.

6·25 전쟁중에 우리나라 어린이들이 겪었던 고통을 직접 보았고 나 또한 겪었던 고통을 생각하면 이라크 전쟁이 먼 나라 이야기 만으로 들리지 않는것이 우리세대들일 것이다.

전쟁의 공포와 배고픔 빈곤함 등등....

전쟁이 터진이후 3분의1로 줄어든 관객 앞에서 나는 지금 연극' 메디슨 카운티의 추억'을 공연중이다.

이와중에.... 그러면서 자꾸 50여년전 대포소리에도 작은 가슴이 콩콩 뛰면서 겁에 질려있던 7살의 내모습이 보여서 몹시 괴롭다.

지금 이순간에도 이라크의 어린이들이 고통과 두려움에 질려있는 모습이 자꾸 어른거린다.

〈연극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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