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2월 24일 밤 모스크바 크렘린 궁. 제 20회 소련 공산당 대회 폐막 직후 당 제1서기인 흐루시초프는 7시간에 걸쳐 스탈린 규탄 비밀보고를 낭독한다.
제목은 '개인 숭배와 그 결과에 대하여'. 3월16일 비밀보고를 입수한 모택동은 그 내용에 충격을 받고 중국에서도 개인숭배를 비난하는 자가 나타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10년 뒤 문화혁명을 촉발시킨 한 원인이 됐다.
1966년 5월 25일 북경 대학에 처음으로 대자보가 나붙었다.
북경대 여강사 등 7명이 연서한 대자보는 기존 질서를 신랄히 비판한다.
대자보 며칠 뒤인 1966년 6월초 청화대 부속중학교 대자보에서 처음으로 '홍위병'이란 표현이 나타난다.
홍위병은 문화혁명에 참가하고자 결성한 부속 중학생들의 자주 조직이었다.
1966년 8월 18일 천안문 광장에서 문화혁명 축하 군중대회가 열렸다.
모택동을 포함하는 소위 '100만인 집회'였다.
이 날 이후 홍위병이 전국적으로 날뛰기 시작한다.
구(舊)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습관을 때려부수자는 4구(舊) 타파가 제안되고, 지주.부농.반혁명분자.악질 분자 등 4류 분자를 타도 대상으로 선정한다.
4구 타파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간 홍위병들은 규탄 대상이 된 사람들의 집을 마구잡이 습격했다.
1966년 8월 27일부터 9월 1일까지 북경 남부의 대흥현에서는 4류 분자 색출 명목으로 1천529명이 집단 학살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당시 실용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추종자, 즉 주자파(走資派)로 몰려 대중적 비판을 받는다.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를 잡기만 하면 된다"는 등소평의 백묘흑묘론(白猫黑猫論)이 이때 등장한다.
그러나 1976년 4월 4일, 1차 천안문 사태로 등소평은 당내외 일체 직무에서 해임된다.
10년 간의 문화혁명은 한편의 드라마였다.
그러나 그 역사적 평가는 참담하다.
중국 문화를 모조리 파괴한 현대판 분서갱유(焚書坑儒)로 비유된다.
문화 뿐 아니라 경제적 손실도 엄청났다.
근대화의 호기를 놓침으로써 후진국가 탈출이 그만큼 늦어진 것이다.
중국이 문화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이지 않았더라면 한국의 근대화가 큰 차질을 받았을 것이다.
자본과 수출시장에서 한국과 중국의 경쟁은 불가피했고, 우리의 악전고투 또한 충분히 예견되는 일이었다.
이웃 중국의 역사적 시행착오를 지금 우리가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중국의 문화혁명과 흡사한 사회변화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홍위병 대신 인터넷 전사(戰士)들이 공격의 날을 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기존체제에 대한 부정과 파괴의 욕구도 닮아있다.
지역 출신 이창동 문화부장관의 기행(奇行)은 이 시대가 정상이 아님을 알려주는 상징이다.
국민을 두려워하지도, 역사를 겁내지도 않는 그의 행적에서 우리는 당혹과 안타까움을 느낀다.
노무현 대통령의 불안한 언사는 우리를 부끄럽고 우울하게 만든다.
청와대 내부 모임에서 "우리는 일부 언론의 시샘과 박해 속에서 우리를 방어해야 한다""통제되지 않은 (언론)권력, 검증 받지 않은 (언론)권력은 대단히 위험하다"고 말했다.
가장 위험한 권력은 노 대통령이 가진 정부권력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제 국회연설에서는"(DJ정권에 이어)나 또한 부당한 공격을 받아왔고 그 피해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다"고 술회했다.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투정부리는 모습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지난 얼마 동안 '토론공화국'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토론은 나라의 발전적 지표나 비전을 만들기 보다 반목과 갈등을 생산해내는데 기여했을 뿐이다.
들리는 것이라곤 각계 각층의 으르릉 대는 소리뿐이다.
그 반목과 갈등을 대통령이 주도하는 인상을 준다.
파병안 처리에 온 국민이 양편으로 갈리도록 하고, 한총련 합법화로, 난데없는 제주 4.3사건으로 국민들을 두 동강내고 있다.
대통령의 할 일이 갈등적 토론 주제를 만드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대통령직이 그렇게 단순하고 한가한 자리일 수 없다.
대통령의 감정적 사치로 비쳐지는 언론과의 전쟁도 이제 그만 그쳐야 한다.
저 불안과 시름에 빠진 민심을 돌아보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식당은 문을 닫게 생겼고, 택시는 손님이 없어 아우성이라는 소리가 넘쳐난다.
기업들도 못해먹겠다는 푸념으로 밤을 지샌다.
무역수지 적자가 내리 3개월 째 계속되고, 실업난은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세계는 시시각각 변하고, 일본과 중국의 틈새에 낀 우리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한국판 문화혁명이 언젠가 올가미가 되어 우리의 목을 조여올 것이다.
5년 뒤 통곡하면 늦다.
더 이상 우리 사회를 갈등으로 몰아넣어서는 안된다.
건설적 비전을 향해 국민들을 이끌고, 일상에 허덕이는 민심으로 눈길을 돌려야 한다.
그 속에 정치개혁도 있고, 언론개혁도 있는 것이다.
박진용 논설위원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정진호의 매일내일(每日來日)] 3·1절에 돌아보는 극우 기독교 출현 연대기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김세환 "아들 잘 부탁"…선관위, 면접위원까지 교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