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1천30여명의 한인을 참담한 부채노예 생활로 몰아넣은 멕시코 이민은 이 나라에서 끝나지 않았다.
한인들 일부가 진정한 신천지를 찾겠다며 지구의를 반바퀴 돌려야 나오는 카리브해 한가운데 '사탕수수의 섬나라' 쿠바로까지 옮겨가 영영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풍운의 혁명가 체 게바라의 동지였던 피델 카스트로가 44년간 독재체제로 이끌어 온 골수 사회주의국가, 우리와 수교관계가 없어 아직도 미지의 땅으로 치부되는 이 나라에서 5세대째 이어져온 700여명의 한인 후예들은 '버려진 동포',즉 기민(棄民)에 다름아니다.
멕시코의 한인들은 1910년 발생한 혁명 때문에 엄청난 혼란과 생계위협에 휩싸여 제대로 정착도 하지 못하고 대이동을 시작, 멕시코 각지로 뿔뿔이 흩어져 전전했다.
멕시코 혁명정부의 외국인 배척정책과 현지인들의 동양인에 대한 적개심으로 한인들은 냄비 땜일이나 날품팔이, 허드렛일 등 천한 일을 하며 궁핍하게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1920년을 기해 1차 세계대전 여파로 불황이 심화되고 애니깽 산업이 몰락의 길로 치달아 가뜩이나 빈곤한 한인들을 더욱 괴롭혔다.
"이에 반해 인근 쿠바는 1차대전 뒤 설탕수요 폭증과 사탕산업의 활황으로 유럽인에게 '쿠바의 풀'로 알려진 사탕수수 농장에 1850~1870년대에 온 중국인과 1890~1920년대 이주한 일본인만으로는 노동력이 크게 부족하고 임금수준도 높아 한인들이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아 쿠바로 가는 계기를 제공했다"고 이자경(59.여) 한.멕역사연구소장은 설명한다.
이 소장에 따르면 당시 혼자 쿠바의 아바나에 건너가 살았던 한인 이화룡(이해영, 이혜영)이 1920년 8월 쿠바 동북단 마나티 지역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주들과 6개월 내에 한인 노동자 400명을 공급키로 계약하고 멕시코정부의 승인을 받아 이듬해 1월 멕시코에서 이민모집에 나섰다는 것.
지역별로 푸론테라 98명, 메리다 95명, 베라크루스 81명, 코앗사코알코스 14명 등 모두 288명의 한인이 1921년 3월2일 이민선을 타고 유카탄반도 프로그레소 항구를 출발, 3월11일 마나티 항에 도착했다고 한다.
수도 아바나에서 동쪽으로 700㎞나 떨어진 이 곳은 오래전 항구기능을 상실, 현재 버려진 폐항으로 좁은 비포장길 18㎞와 녹슨 철로를 통해 내륙 신시가지와 가까스로 연결돼 있다.
쿠바한인회 회장인 이민 2세 헤로니모 임 김(임은조.77)씨는 "쿠바에선 이민자가 291명이라는 설이 유력하고 300명, 350명, 500명이나 된다는 얘기들도 있으며, 3월25일 배가 도착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면서 '멕시코 이민이 주로 가족단위로 이뤄졌으나 쿠바 이민은 멕시코 이민자의 1.5세나 2세인 독신자가 많았다'고 밝혔다.
헤로니모씨는 또 "쿠바 집단이민 이전에 이화룡 말고도 부산 출신 어부들의 정착지인 멕시코 코앗사코알코스에 살았던 부산 동래 출신의 문치호가 쿠바로 건너와 1917년 4월24일 58세에 사망했으며, 이 해에 멕시코시티의 서현우 서윤 서온 이용태 등이 쿠바에 와 있다가 얼마 안돼 되돌아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전했다.
마나티에 도착한 한인 이민단은 국적 시비로 배에서 내리지 못하고 17일 동안 정박당하는 신세가 된다.
쿠바정부가 한인을 일본사람으로 취급해 한인들의 강한 반발을 사고, 재쿠바 일본영사는 한인을 괘씸하게 여기고 일본인으로 간주하지 않아 서류처리 문제가 복잡해졌기 때문.
당시 멕시코의 한인 대부분은 일본영사관의 끈질긴 회유.협박에도 불구, 일본 귀화를 거부하며 무국적자로 남기를 고집한 터라 쿠바 입국과정에서도 나라없는 설움을 곱씹고 수모를 겪은 것이다.
쿠바의 한인 후손들은 "긴급 지원요청을 받은 재미 국민회 및 메리다한인회의 항의로 결국 쿠바측이 한인의 존재를 인정, 3월28일 상륙을 허용했다"며 "이 사건은 멕시코.쿠바 이민사는 물론 한국 근대사에서 투철한 민족의식을 세계만방에 떨친 쾌거로 평가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민 한인들은 계약에 따라 마나티 사탕수수농장에서 20~50명씩 집단으로 일하며 중남미 이민의 효시를 이룬다.
하지만 이 때 공교롭게 국제 설탕값이 과잉공급 때문에 종전가의 10분의 1로 폭락, 하향곡선을 그리면서 문을 닫는 농장들이 속출해 일감이 크게 줄고 급여도 급락했다.
새로운 삶의 꿈에 부풀었던 한인들은 취업 2개월만에 일자리를 잃고 유랑하는 불운한 처지로 전락했다.
그러나 80년의 긴세월이 흐른 2001년 3월25일 한인 후손들은 선조들이 첫발을 내디딘 마나티 땅에 한국과 쿠바를 상징하는 3m 높이의 '한인 이민 80주년 기념탑'을 제막,망향의 한을 달래며 성지로 삼고 있다.
"1921년 3월25일 이 곳 마나티항구에 멕시코에서 300여명의 한인동포가 기선 따마을리빠스 편으로 쿠바에 이민으로 왔습니다.
그 후예들은 쿠바 각지에 흩어져 잘 적응하여 살고 있으며, 조상의 얼을 기리고 그 뿌리를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80년이 되는 오늘 이 곳에 기념탑을 세웁니다".
탑신에 한글과 스페인어로 새겨진 건립취지의 글이다.
기자가 멕시코를 거쳐 쿠바에서 더듬어 본 한인이민의 뿌리는 참 튼튼하고 질겼다.
마나티=강병균기자
사진=강선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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