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희생제

원시 사회에서는 부족의 안녕을 위해 죄 없는 사람이나 동물을 희생시켜 신체의 일부나 전부를 초월적 존재에게 바치는 '희생제'가 있었다.

르네 지라르는 그의 저서 '희생제'에서 이 원시적 제의가 문명화된 오늘날에도 없어지지 않고 엄연히 살아있음을 밝히고 있다.

"여러가지 갈등이 난마처럼 얽혀 그 해결의 부담이 비등점에 이르렀을 때 그 사회의 주도권을 쥔 세력은 하나의 공격대상을 지목한다.

그 공격대상은 보복조치를 취할 수 없는 것으로 선택하며 이 과정에서 이제까지 서로 대립하던 여러 세력들은 이를 공동의 공격목표로 하여 하나의 테두리로 묶여버린다.

이 같은 희생제를 통해 하나로 묶이게 된 과거의 적대세력끼리는 적절한 수준에서 화해와 타협의 장을 마련하고 그 사회는 희생제를 주도한 세력의 의도대로 움직인다".

관동 대지진에서 조선인이 겪었던 처참한 수난이나, 나치 치하의 유대인 등이 바로 희생제의 대표적 예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비열한 축제는 오늘 한국 땅에도 공공연히 재연되고 있기도 하다.

광복 이래 이 땅에서 저질러진 희생제의 대표적 테마는 '빨갱이' 사냥일 것이다.

4월 9일은 '사법살인'으로 불리는 소위 '인혁당' 사건으로 희생된 분들의 28주기다.

'북한의 지령으로 학생시위를 배후 조종하고 국가전복을 기도했다'는 혐의로 군사법원에서 8명이 사형선고를 받은 뒤 20여시간만에 전격적으로 형이 집행되었던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은 이 땅에서 벌어진 가장 부끄러운 희생제였다.

작년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는 '인혁당' 사건이 당시 유신 체제에 저항하는 민주화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중앙정보부 주도하에 이루어진 조작 사건임을 밝힌 바 있다.

국제법학자회의는 이 사건 최종판결을 한 1975년 4월 8일을 '사법 암흑의 날'로 선포했으며, 지난 1995년 4월 문화방송이 판사 315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이 사건 재판이 "우리나라 사법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재판"이었다고 응답한 바 있다.

서도원, 송상진 선생 등 희생자 대부분이 지역 인사였던 점에서, 이 사건의 진상 규명에 우리 지역이 입을 다물고 있음은 치욕스런 희생제 보다 더 치욕스러운 일이다.

나우필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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