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밥퍼주기 4년 배고픈 노인의 보살

쌀쌀한 봄바람이 불던 지난 2일 대구 남산동 무료 급식소 '자비의 집'. 오전 11시30분 급식이 시작되자 바깥에서 기다리던 노인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일었다.

지팡이를 짚은 할아버지, 남는 밥을 얻어 가려고 배낭을 메고 온 꼬부랑 할머니, 야유회라도 나온 듯 말쑥이 차려 입은 할아버지까지….이들은 초교생 아이들 마냥 얌전히 급식소 앞에 줄을 지었다.

고봉으로 담긴 밥에서는 모락모락 김이 났다.

음료수에 빵까지 얹은 식판이 묵직했다.

한 팔순의 할머니가 밥 퍼주는 초로의 아주머니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장 보살님, 고맙심니더".

인사를 주고 받는 사람은 이 급식소 '봉사 부장'인 장춘강(60.여.대구 검사동)씨. 그는 이곳을 찾는 노인들에게 그야말로 '보살' 같은 존재이다.

발갛게 김칫물이 든 고무장갑을 낀 장씨는 밥을 퍼다가도 자주자주 허리를 펴고 급식소 내를 둘러봤다.

앉을 자리가 없거나 식판이 무거워 들지 못하는 노인들이 있는가 살피는 것이다.

급식소의 전체 운영을 맡고 있기도 하기때문이다.

장 부장은 1998년 4월 급식소가 문을 연 후 쉬는 날인 토일요일을 빼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이곳으로 출근해 왔다.

오전 9시쯤 도착하면 전날 사 놓은 야채를 다듬고 쌀을 씻어 안친다.

요일을 정해 번갈아 가며 오는 10여명씩의 봉사자 아주머니들의 손놀림도 덩달아 바빠진다.

입소문이 퍼지면서 첫해 100여명이던 손님들은 6년만에 350~400여명으로 훌쩍 늘었다.

봉사자들은 급식이 시작되기 전에 미리 밥을 먹는다.

봉사에 별다른 대가가 없는데도 밥값으로 1천원씩을 꼭 낸다.

밥 먹으러 오는 이들도 돈을 내야 한다.

기준은 한끼에 100원. 얻어 먹는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하려고 배려해 마련한 제도라고 했다.

하지만 10원, 50원을 내는 이도 있고 전혀 안내는 이도 있다.

그러나 누구도 이를 탓하지 않는다.

한 바탕 분주한 급식이 끝나고 설거지를 마치면 오후 3시쯤. 서로 인사를 나눈 뒤 총총히 집으로 되돌아 가는 봉사자들을 보내고 나면, 장 부장은 하루 '매상'을 정리한다.

좌르륵…동전을 쏟아 세어 보니 오늘 '수입'은 3만4천140원. 그러나 정작 매상의 잣대는 다른 것이었다.

"밥 그릇 국 그릇을 봐야 제대로 알아요. 오늘은 368명이 왔다 갔네요".

장 부장은 해방둥이지만 일본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두 살 때쯤 부모를 따라 귀국했다는 것. 50년 신자여서 '법연화'라는 불명으로 많이 불리지만, 일본과의 인연때문에 그에겐 '하루에'(春江)라는 일본식 이름도 있었다.

그리고 봉사자들이나 이곳을 찾는 노인들에겐 그저 '살만한 형편의 사모님'으로만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장 부장은 대구 신명학교를 졸업한 뒤 가세가 기울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상업고교로 진학해야 했다고 했다.

그 후 3년간 대구시청에서 근무하다 결혼 뒤 두루마리 화장지 공장을 세운 게 전기가 됐다.

한창 아파트가 들어서던 1970, 80년대 화장지 수요가 늘면서 사업이 번창한 것. 그 일을 16년간 했다.

그러나 장 부장은 화장지 사업을 접었다.

6.25 상이용사 미망인들을 지원하는 '계림복지회'와 '뇌성마비 장애인 협회' 활동으로 방향을 바꿨다.

무료 급식소 일도 계림복지회 활동이 인연이 됐다.

함께 활동하던 동화사 고 최동원 신도회장이 '자비의 집'을 창립하면서 "장 보살, 당신이 좀 도와줘야겠소" 하고 제의했던 것이다.

급식소 일은 호랑이 같은 통허스님과 함께 시작했다.

급식소 일은 또 다르더라고 했다.

밥을 푸면서 울어야 하는 것이 가장 큰 차이였다.

가난한 가족의 입을 덜어 주려 말쑥하게 차려 입고 집을 나서 3, 4시간 전부터 급식을 기다리는 할아버지, 이곳에서 먹는 한끼로 하루 식사를 삼는 노인들이 장 부장을 울게 했다.

매일 오던 노인이 하루 이틀 안보이더니 드디어 돌아가셨다는 말이 전해져 오는 것도 가슴을 아리게 했다.

가끔씩은 행패부리는 젊은이들도 눈물을 보태게 만들었다.

"어차피 공짠데 더 내놓으라"고 심통을 부리며 이들은 식판을 뒤엎었다.

하지만 하루도 빠짐 없이 묵묵히 봉사하는 장 부장의 모습에 급식소를 찾는 이들도 차츰 순해져 갔다고 했다.

나이가 좀 더 많아 보이거나 몸이 불편한 순으로 줄을 설 줄도 알게 되더라고 했다.

급식소에서 나눠 주는 점퍼나 양말을 술로 바꿔먹는 이들도 없어졌다.

이젠 무거운 짐을 대신 들어 주고 칼을 갈아 주는 이들도 생겼다.

그중 몇몇은 이곳에서 만나 부부가 되기도 했다.

염불 대신 노인들이 좋아하는 '뽕짝'이 쉼없이 흘러나오는 급식소에서 장 부장 자신도 간혹 노래를 흥얼거렸다.

"물새 우~는 고~요한 밤 언덕에 / 그대와 둘~이서…" 옆의 자원 봉사 아주머니가 빙그레 노래를 따라 불렀다.

"나이가 드니 뼈마디가 쑤시기도 합니다만, 아침에 깨면 늘 기도를 합니다.

'아, 오늘도 이렇게 몸을 움직일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요". 장 부장은 집에 돌아가면 당뇨에 걸린 남편을 수발한다.

구순이 넘어 돌아가신 시부모님 봉양에도 흐트러짐 없게 애써 왔다.

올곧은 부모를 따라 2남1녀 자녀들이 회계사.공무원으로 바르게 자라줬다.

자녀들은 자주 급식소를 찾아 일손을 돕는다.

장 부장은 얼마 전부터 급식소 행정업무를 인계받고 있다.

총책임자인 통허스님을 대신해 관공서도 출입하고 높은 사람들도 만난다.

몸이 허락하는 한 이 일을 계속 할 작정이라고 했다.

통허 스님도 든든해 하는 듯했다.

"가진 사람이 선행을 베풀기는 더 어려운 법인데… 장 보살은 참보살이야".

장 부장의 선행 공식은 참으로 간단했다.

"배고픈 사람이 줄면 나쁜 일 하는 사람도 줄어 좋은 나라가 되지 않겠습니까?" 명쾌한 '장보살식 선행 공식'이었다.

최병고기자 cb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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