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중진.중견작가 콩트 릴레이

어느 눈 파란 전쟁사가의 말을 빌리면 전쟁은 '인류의 기원만큼 오래됐으며, 인간 심성의 가장 비밀스러운 자리에서부터 비롯된다'고 한다.

나도 이 말에 공감하는 편이다.

요즘 아이들도 인터넷 따위에서 매일같이 의사전쟁(擬似戰爭)을 치르지만 내 어릴 때도 나날이 전쟁에 휘둘렸다.

인류의 기원은 아니지만 기억의 기원은 되는 셈이다.

연탄재싸움이니 칼싸움이니, 잿봉지 싸움이니 하는 것들인데 어른들이 보기엔 한낱 지저분하게 빨랫감만 느는 걸로 치부할 터지만 당사자인 아이들에게는 실로 심각하고 자존심이 걸린 놀이였다.

하긴 우린 두발로 걸어다닐 때부터 전쟁 같은 것에 매우 익숙해 있었다.

누구네고 할 것 없이 대개의 집들은 폭탄 덩어리였다.

당시 집들은 대개 흙으로 지었다.

초가는 물론이고 번듯한 기와집도 담장이나 곳간은 흙벽이었고 대청마루의 벽마저도 회가 뜯긴 자리에는 어김없이 누런 흙이 내보였다.

그런데 바로 그 흙벽에는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은 화약들이 박혀있었다.

모르긴 해도 육이오 때 불발탄이나 유탄이 뒹굴다가 오랜 세월을 거치며 흙에 묻혔을 터이고, 유탄에서 쏟아져 나온 화약들이 진흙에 섞여 있다가 집을 지을 때 담장 속으로 들어갔음에 틀림없었다.

우리는 심심하면 벽에 붙어 서서 젓가락으로 밥알 같은 화약을 발겨냈다.

두어 명이 합세해 30분만 작업을 해도 한 홉 분량은 너끈히 장만할 수 있었다.

우리는 발겨낸 화약을 마당에다 기차처럼 길게 늘어놓고 한쪽 끝에 불을 붙였다.

그러면 정말 기차가 가듯이 굉음을 내며 전진하는 불꽃을 신나게 구경할 수 있었다.

집은 마치 전쟁의 살아있는 화석 같았다.

그때가 막 70년대에 들어설 무렵이었다.

학교에서는 '상기하자 6.25'를 목청껏 가르쳤지만 '화약으로 지은 집'에 사는 우리들은 따로 6.25를 상기할 필요조차 없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마을의 사내아이들은 스스로 전쟁의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는 어찌 배길 터인가. 그러잖아도 몸이 근질근질한 성장기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수없이 전쟁놀이를 하던 내 어린 시절을 돌이키면 전쟁은 그다지 유쾌한 것만 아니었다.

바로 대격전을 치렀던 마지막 전쟁의 기억 때문이었다.

내가 고향을 떠나게 된 직접적인 계기도 그 마지막 전쟁에 있었다.

그날의 전쟁은 이전과는 많이 달랐다.

우선 참가한 아이들의 숫자부터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마 늦가을이었고 이듬해 봄까지 전쟁놀이를 하기 힘들다는 조바심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가방 매고 학교 다니는 사내아이들이 모두 마을 철도부지로 불려나왔다.

그다지 큰 마을이 아니었는데도 모인 아이들은 쉰 명을 넘었다.

아이들은 대개 제법 근사한 칼을 한 두 자루씩 가지고 있었다.

칼이 없는 조무래기들은 지게 작대기라도 가지고 와야했다.

나는 그때 초등학교 오학년이었다.

마을에는 이상하게 육 학년이 별로 없었다.

이날 전투도 오학년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크게 두 패로 나누고, 각기 진영은 소대장이 부대원들을 통솔하게 하고 대장은 전체를 지휘하되 직할부대를 이끌게 했다.

우리는 마을 뒷산에서 전투영역의 경계를 설정한 뒤, 전투 중에 팔 다리가 아닌 몸체에 직접 칼을 맞은 아이는 칼을 빼앗기고 체포되어야 한다는 협정을 맺었다.

양쪽 진지에는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포로수용소를 마련했는데, 포로들은 소나무에 묶여 있어야하는 수모를 겪도록 했다.

내 또래 아이들은 제법 칼싸움에 능했다.

그리고 만화책이나 옛 얘기에서 주워들은 전술이란 개념을 알고 있었다.

나는 우리편 병정들을 모아놓고 대장답게 목청을 돋웠다.

"모두 내 얘길 들어. 우리는 학진법을 쓴다, 알겠어? "

"어, 그게 뭔데?"

"자식, 학이 날개를 펼치듯이 진용을 짠다는 말이야. 적이 쳐들어오면 날개를 닫고 섬멸해버리는 거야".

공격하는 책략도 설명했다.

부대원들을 매복시켜서 기습공격을 감행하고, 일부러 져주며 도망치는 유인책을 쓰겠다는 등 우리가 할 수 있는 갖가지 전쟁술을 동원했다.

그날 오후 두 시쯤 시작된 전투는 꽤나 길게 이어졌다.

해가 이윽고 기울 무렵이 되자 진용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조무래기들은 칼을 버리고 집에 갈 눈치였다.

그러자 대장격인 나는 아이들을 다그치기 시작했다.

한번 멋떨어지게 붙어볼 셈이었다.

우리 진용은 뒷산의 왼편에 있었고 상대는 오른 편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흐트러져 있는 틈을 타서 기습공격을 감행하기로 했다.

나는 날쌘 우리편 부대장을 시켜 적군이 쉬고 있는 묏봉 위로 잠입하게 했다.

그리고 우리편 아이들은 묏봉 아래께로 살금살금 기어가게 했다.

나는 그들이 있는 묏봉 근처로 가서 공격신호를 내릴 참이었다.

곧장 저들 앞에 다가갈 방법으로 나는 벼랑을 타고 내려가기로 했다.

묏봉에서 십여미터쯤 떨어진 곳에 큰 바위가 깎아지른 듯 박혀있었는데 대략 육 칠 미터는 되는 높이였다.

물론 바위 옆으로 몸을 숨기고 내려가면 되지만 그것은 대장이 마지막 공격으로 사용할 방법은 결코 아니었다.

나는 벼랑위로 다가가, 미리 잠입해 바위 위쪽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우리편 부대장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는 벼랑 위 소나무에 밧줄을 매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소나무에 밧줄이 튼튼히 매여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벼랑 끝으로 달려갔다.

이윽고 밧줄이 던져졌다.

나는 잽싼 몸동작으로 밧줄을 잡고 바위 아래로 발을 내렸다.

그 순간이었다.

몸이 그냥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었다.

뭔가 잘못 되었구나 싶었으면서도 나는 목숨처럼 밧줄을 움켜잡았다.

잠시 후 내 몸이 벼랑 아래로 나동그라졌다.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왼팔에 격심한 통증이 일었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밧줄을 먼저 길게 내려놓고서 밧줄을 타야하는데 밧줄 끝을 잡고 벼랑을 내려섰던 것이었다.

그러니 밧줄만 잡았지 그냥 벼랑을 뛰어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벼랑 아래로 떨어지자 소대장 아이들이 몰려왔다.

나는 겨우 열 두 살이었다.

그러나 팔을 부여잡고 울음을 터트리려 할 때, 어떤 열기가 휘몰아치는 것을 느꼈다.

"자, 모두 공격! 박살을 내는 거다". 한팔로 칼을 높이 쳐들고 외쳤다.

집단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뒤죽박죽 섞여서 칼싸움을 해도 상급반 아이들이 조무래기들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승리보다 비겁한 것을 더 싫어했다.

나는 아픈 팔을 부여잡고 큰 아이들만을 상대했다.

적의 대장과 부대장이 나를 향해 뛰어왔다.

나는 한 팔만 움직여서 적의 소대장 두 명을 베기까지 했다.

나는 얼마 안돼 적의 칼을 맞고 말았다.

칼을 빼앗겼고 포로가 되는 수모를 당했다.

나는 협정에 따라 소나무에 묶인 상태로 우리편 아이들의 전투를 구경할 처지가 돼버렸다.

대장을 잃은 우리편 아이들은 이내 흐무러지기 시작했다.

이튿날 대구로 올라와 병원에서 사진을 찍었다.

팔꿈치 관절부위가 완전히 동강이 나있었다.

장기간 병원 치료를 받아야했다.

그 길로 고향을 떠나 대구로 전학했다.

X-선 사진이 나왔을 때 의사는 놀라워했다.

"교통사고 났어? 팔이 왜 이래?"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때만 아니다.

지금까지도 대답을 못 할 것 같다.

무엇 때문에 겨우 초등학교 5학년 나이에 팔이 부러진 상태로 칼싸움을 계속했는지, 왜 울음 대신 "자 모두 공격!"이란 고함을 치게 됐는지를. 또한 내가 입은 상처가 단순한 우발적인 실수인지, 전투중의 한 장면인지, 지금도 모호하다.

분명한 것은, 서두에 인용한 것처럼 '전쟁은 인간심성의 가장 비밀한 자리에서부터 비롯된다'는 말이 실감된다는 것뿐이다.

▲1961년 경북 영덕 출생 ▲영남대학교 독문학과 졸업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화살과 구도'당선 ▲작품집-'슬픈 열대' '어린 연금술사' '황금색 발톱' '유혹의 형식'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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