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4)잊혀진 쿠바의 한인들-민족 공동체사회 형성

고된 애니깽 작업과 극심한 생활고. 이를 한인들이 이겨내는 길은 공동체를 만들어 내부 결속을 다지는 길밖에 없었다.

마탄사스의 '핑카 엘 볼로' 애니깽농장에 입주한 한인들은 즉시 미주 국민회로 연락을 취해 입주 14일만인 1921년 6월14일 서병학을 초대 회장, 박창운을 총무로 한 국민회 쿠바지방회를 창립한다.

쿠바 한인회장 헤로니모 임 김(77)씨는 "한인들은 지방회 발족으로 아버지의 튼튼한 팔이나 어머니의 따스한 품 같은 버팀목과 구심점을 갖게 돼 조국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나온 심리적 불안감을 떨쳐버렸을 것"이라며 "이 해 11월1일 마탄사스 주정부에 창립보고서를 제출해 공식단체로 인가받았고, 이 문서는 현재 마탄사스 역사박물관에 보관돼 있다"고 말했다.

이 보고서를 살펴보면 동포사회 상부상조와 교육·문화사업 전개가 창립목적이며, 정체성 고취를 위해 교육비를 많이 지출했음을 알 수 있다.

한인들은 농장 부근에 대형 목재막사를 지어 공동취락 생활을 하며 한인촌을 형성했다.

이 곳엔 1921년 10월5일 쿠바 최초의 한인교회인 감리교회가 세워졌고 이듬해 2월18일 한글학교인 민성(民成)학교가 설립돼 2세 교육의 발판이 마련됐다.

이 학교는 초대 교장이 이세창, 교사는 헤로니모씨의 부친인 임천택이었고 우리 말과 역사를 가르치며 1932년까지 지방회 임원과 학부모들의 후원으로 운영됐다.

이후 지방회의 부속학교로 편입됐으나 자주 재정난에 봉착해 1940년대 후반에서 1951년까지 문을 닫기도 했다.

지방회는 1926년 10월7일 감리교회에 국어교육기관인 중앙기독학교도 설립했다.

특히 지방회는 청년단체의 필요성을 절감해 오다 1932년 3월10일 청년학원을 창설했다.

헤로니모씨는 "청년학원은 야학교실을 통해 독서·동화구연·토론·강연회를 개최해 민족혼과 애국심이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아버지가 원장 겸 교사로 헌신하다가 신경쇠약증에 걸려 휴원하고 말았다"며 1936년 3월1일 국민회가 청년운동 활성화를 위해 쿠바 마탄사스 청년지부로 부활시켰으나 1년 뒤 쿠바인들의 외국인 배척운동과 자금난으로 침체되고 말았다고 설명했다.

취재팀이 둘러본 마탄사스 애니깽농장 및 한인촌 터는 지금 초원으로 변해 80여년전 300여명의 한인들이 모여 살았던 막사 흔적을 찾을 길이 없고 공동우물도 폐쇄돼 무성하게 자란 잡초로 뒤덮여 있었다.

하지만 한글학교 건물과 옆에 딸린, 헤로니모씨가 태어났다는 방은 크게 낡은데다 쿠바인이 들어가 살면서 낯선 이방인인 취재팀을 경계하긴 했으나 거의 옛 모습 그대로여서 한국말로 수업했던 스승과 어린 제자들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퍼지는 환청에 사로잡히게 했다.

쿠바의 최하층민도 꺼렸던 애니깽 농장생활 속에서 바쁘게 발품을 팔았을 한인들의 족적이 다져놓은 길도 곳곳에 남아 있어 현지 농민들의 집과 일터를 연결하는 우마차 길로 이용되고 있었다.

13세 때부터 부모를 도와 농장일을 했다는 헤로니모씨는 "어린 나이에 새벽 3~4시에 일어나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 온종일 무더위와 싸우며 허리를 숙여 키의 배이상 되는 애니깽 잎을 자르느라 수없이 가시에 찔렸다"며 "생각하기도 싫은 지옥생활이었지만 일·월·수요일 밤 열리는 교회목회는 위안이 됐다"고 회고했다.

마탄사스 시내에서 비디오 대여점을 하는 이민 4세 샤일리 허(조수미·33·여)씨는 "이민 1세들은 고달픈 삶 속에서도 흉금을 털어놓고 얘기하며 서로 돕고 근면성실하게 살았으며 교육열도 높아 아침에 자녀를 한글학교에,낮엔 쿠바학교에 보내며 공동체사회를 꾸려갔다.

옛날에 한인촌 막사 앞에 조그만 운동장이 있어 남자들과 아이들이 운동을 하고, 밤마다 부녀자들이 횃불을 밝혀놓고 춤추거나 담소하며 휴식을 취하는 장소로 이용돼 한인들이 일상의 고통을 털어내고 희망을 키우는 화합마당이 됐다"고 밝혔다.

그는 "어른들은 한국문화를 잊지 않으려고 틈만 나면 한국무용과 노래, 전통악기를 즐겼으며 쌀밥과 김치 지짐이 콩장 등 한국음식을 해먹었고, 나라 잃은 우리와는 달리 본국과 식자재를 거래하던 청국(중국)인들에게서 미역 다시마 새우젓 등을 구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일부 한인들은 농장 일거리가 부족, 먹고 살기가 힘들어 인근 설탕무역항 카르데나스로 옮겨가 1923년 진성(進成)국어학교를 설립해 한인사회 결속에 힘썼다.

이 학교는 얼마 못가 재정난으로 운영을 중단했으나 1929년 6월 임천택이 마탄사스에서 이주해 와 1932년까지 사는 동안 다시 문을 열고 활발한 교육사업을 펼쳤다.

또 카르데나스의 한인들이 1926년 국민회 산하 카르데나스지방회를 조직하면서 마탄사스의 쿠바지방회는 마탄사스지방회로 개편됐으며, 1937년 수도 아바나에도 지방회가 설립돼 흥민국어학교를 세웠다.

3개 지방회체제의 한인사회가 탄생하자 조국의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됐다고 한다.

마탄사스:강병균기자

사진 :강선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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