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정상에서 방명록에 서명을 한다.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할지 모르지만 충북 영동군 양산면과 충남 금산군 제원면에 걸쳐 있는 천태산(天台山·714.7m)에 오른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이름을 남긴다.
산 꼭대기에 설치된 스테인리스 스틸 통 속에 들어 있는 방명록에.
신라 문무왕 8년 원각대사가 창건한 절로 국청사(國淸寺)라고 하다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머물면서 국태민안을 비는 기도를 올리고 간 이후 이름을 영국사(寧國寺)로 한 고찰을 품고 있는 천태산은 정상의 방명록이 아니더라도 조금은 유별나다.
등산로 곳곳에 암벽이 놓여 있어 두 발로만은 안돼 두 손까지 다 동원해야 오를 수 있는 바위산이지만 힘들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도록 나무계단, 쇠계단 등 각종 '산행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다.
길 안내 푯말도 '암벽을 통과하면 정상까지는 620m, 돌아가면 720m', '노약자와 어린이는 돌아가세요' 등 다른 어느 산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상세하다.
대부분 양산면사무소 소재지에서 약방을 하는 배상우(72)옹이 20여년 전부터 사재를 털어 설치한 것이다.
천태산 산행코스는 모두 4개. 진주폭포를 거쳐 옥새봉으로 올라가는 1개 코스를 제외한 3개는 모두 영국사가 출발점이 된다.
흐르는 계곡 물소리를 음미하면서 주차장을 출발해 영국사를 향해 500m쯤 걸었을까. 커다란 바위 부근에 자그마한 돌탑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쌓여 있다.
삼신바위다.
조금 더 나아가니 용이 승천한 곳이라 하여 용추폭포라고도 불리는 삼단폭포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고갯마루를 올라서니 커다란 은행나무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영국사의 명물인 수령 1천여년의 은행나무다.
높이 31m, 둥치 둘레가 11m 정도인 거목이다.
가지 하나는 밑으로 자라 새로운 뿌리까지 내렸는데 여기서 자란 나뭇가지 높이도 5m를 넘는다.
국가에 큰 난이 있으면 소리를 내어 운다고 하는 이 은행나무에서는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
사람은 늙으면 추해진다는데 나무는 나이를 먹을수록 위용을 더하는 모양이다.
이 고갯마루에서 250m정도 떨어진 곳에 망탑봉이 있다.
자연석을 평평하게 다듬어 기단을 만든 뒤 그 위에 삼층석탑을 쌓은 것이 이채롭다.
바로 옆에는 물 위로 솟구치는 고래 형상을 한 무게 10여t의 바위가 있는데 한 사람이 흔들어도 움직이기 때문에 흔들바위라고도 한다. 매달려 용쓰는 사람은 못느껴도 옆에서 보면 흔들리는 게 보인다.
본격산행은 영국사를 지나면서 시작된다.
더 위쪽으로는 샘이 없으므로 물은 은행나무 앞 식수대에서 충분히 준비해야 한다.
영국사에서 정상에 이르는 3개의 산행코스 중 직선거리가 가장 짧으면서도 암벽 등반의 스릴을 최고로 만끽할 수 있는 코스는 밧줄을 잡지 않고는 거의 오를 수 없는 암벽 4개가 있는 A코스(미륵길이라고도 함). 빽빽한 소나무가 하늘을 가린 등산로 옆에는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흙이라고는 한줌도 없을 것 같은 바위 틈에서도 꽃을 피우는 진달래 군락은 거의 정상까지 이어진다.
암벽은 정상을 1천100m 남겨둔 지점에서 처음 나타나 1천m, 900m, 720m에서 연이어 나타난다.
물론 암벽에는 튼튼한 밧줄이 매어져 있다.
첫 암벽은 누구나 큰 부담감 없이 오를 수 있다.
하지만 경사는 갈수록 심해진다.
세 번째 암벽에서부터는 '노약자나 어린이는 우회하라'는 푯말이 붙어 있다.
마지막 암벽은 경사가 거의 70~80도 정도인데다 길이도 75m 정도가 돼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팔 힘에 자신이 없는 사람은 우회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다 오르고 난 뒤 아래를 굽어보는 짜릿함은 줄을 잡고 조금씩 조금씩 발을 옮기는 동안의 마음졸임을 다 보상해 주고도 남는다.
4개의 암벽을 지나면 그동안 하늘을 가리던 소나무 대신 위로 쭉쭉 뻗은 울창한 참나무숲이 시야를 가린다.
그러나 아직 잎이 하나도 없어서인가. 나무 사이로 세차게 불어오는 봄바람은 상쾌하기만 하다.
산 정상에는 충남 금산군연합산악회에서 천태산 정상이 금산땅이라며 표지석을 세워놓았다.
표지석 바로 밑 방명록 함에는 모두 8권의 방명록이 들어 있었고 기자가 천태산을 찾은 그날도 등산객들의 방명록 서명은 계속 이어졌다.
암벽은 오르기보다는 내려가는 것이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면 가급적 A코스로 다시 내려오는 것을 피하는 것이 좋다.
공민왕 피란시절 옥새를 숨겨두었다는 옥새봉으로 통하는 길이 나 있는 남고개를 향해 정상에서 400m쯤 내려오자 작은 평지에 소나무 몇그루가 무리지어 서 있다.
한여름 이곳을 찾은 등산객들은 그늘 적은 정상에서보다 이곳에서 요기를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조금 더 내려오니 사방이 확 트이면서 긴 암릉이 나타난다.
바람에 몸이 흔들리다 보니 마치 살아 있는 공룡 등 위에 서 있는 기분이다.
전망석이라는 푯말이 있는 바위에 오르니 양산면을 가로질러 유유히 흐르는 금강과 함께 양산면 소재지가 아련하게 보인다.
인간이 자연을 얼마나 흉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한 눈에 알 수 있는 채석장도 같이 눈에 들어온다.
전망대 바위를 내려와 군데군데 나무계단으로 잘 다듬어진 산길을 5분 정도 걸으면 남고개. 이곳서도 20여분 산길을 다시 오르면 옥새봉으로 갈 수 있다.
옥새봉에서 곧바로 하산하는 주차장쪽으로 하산하는 길이 있지만 길이 너무 여러 갈래여서 잘못 접어들면 고생하기 쉽기 때문에 초행자는 다시 남고개로 돌아오는 것이 좋다.
남고개에서 영국사로 통하는 길 왼쪽에는 보물 534호인 원각국사비 등이 있다.
주차장에서 출발해 영국사~A코스~헬기장~전망석~남고개~망탑봉 등을 돌아오는데는 3시간30분정도 소요된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려면 소형차는 2천700원을 내야하고 입장료(성인 1인당 1천원)는 매표소에서 별도로 받는다.
▶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황간IC에서 내려 4번 국도를 타고 영동 방면으로 15분쯤 가면 주곡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서 옥천쪽으로 계속 진행하면 양강면사무소 및 양산면소재지가 차례로 나오고 양산면사무소 소재지에서 천태산까지는 넉넉잡아 10분이면 도착 가능하다.
▶가볼 만한 곳: 수령 100년 이상의 소나무숲이 금강변을 따라 뻗어 있고 각종 놀이시설 등이 들어서 있는 송호유원지가 바로 인근에 있다.
또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양민을 대량 학살한 '노근리 사건' 현장이 황간IC에서 영동읍 가는 길 중간에 있다.
글·사진 송회선기자 son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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