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보다 한발 앞서 배워야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 많은 학부모와 수험생들은 진지한 검토나 논쟁 없이 이 말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중3 때 고1 과정의 공통수학을 다 배우고, 고1 때 수학Ⅰ.Ⅱ를 다 배우고 나면 고3 때는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교육학자들과 교사, 심지어 사설학원의 입시 전문가들조차도 그런 생각은 착각일 따름이라고 잘라 말한다.
조기 진도의 실태와 그 효율성에 대해 알아본다.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보다 앞서 배운다는 뜻을 나타내는 말로 '조기진도'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흔히 쓰이는 '선행학습'이란 말은 교육학에도 나오지 않는 국적없는 단어. '속진'은 영재교육 등에서 진도를 빠르게 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수과목'은 어떤 과목을 배우기 전에 이수하는 과목을 일컫는다.
◇조기진도는 교실 붕괴의 원인
학생 수가 35명인 일반계 고교 1학년 어느 학급의 수학시간. 교사가 '지수와 로그' 단원을 강의한다.
학급석차 5등 안에 드는 정도의 학생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라 지루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는다.
이들은 엄한 교사가 들어오면 수업 내용과 관계없는 어려운 문제를 풀며 시간을 때우고, 좀 너그러운 교사가 들어오면 편하게 잠을 잔다.
낮에 자 둬야 밤에 좋은 컨디션으로 학원 수업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위권 학생 10여명은 교사가 어떻게 가르치든 애초에 이해가 잘 안 되기 때문에 수업에 아무 관심이 없다.
이들 역시 교사의 성향에 따라 마음껏 떠들거나 잠을 잔다.
절반 가까운 학생들이 수업에 관심이 없으니 중위권 학생들도 덩달아 학습 의욕을 잃게 되고 교실 분위기는 한없이 어수선하다.
교사가 아무리 노력해도 좀체 학생의 주의를 끌 수 없다.
교실 붕괴라는 말도 상위권 학생들이 이처럼 학원에서 조기진도에 빠져들어 수업을 외면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조기진도는 학원간의 차이까지 만들어내고 있다.
서울 강남이나 대구 수성 학군에 학생들이 많이 몰리는 이유 중 하나는 소위 잘 나간다는 학원들이 밀집돼 있고 입시 정보도 상대적으로 풍부하기 때문이다.
이 지역 학원들 가운데 상당수는 학부모와 학생들의 조기진도 욕구를 교묘히 조장하고 자극하며 이를 만족시켜 줌으로써 유명세를 얻고 있다.
사교육에서의 차이는 곧 학교교육의 차이로 이어지고 여기에서 학군간 학력 격차도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조기진도의 영역별 부작용과 대책
▲수학
모든 교과가 다 그렇지만 특히 수학은 한 단원의 개념을 완전히 이해하고 나서 응용 문제로 그 내용을 다져야 다음 단계로 쉽게 넘어 갈 수 있다.
여러 단계를 거치는 과정에서 어느 한 부분만 소홀히 해도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기가 어렵다.
많은학생들이 현재 배우고 있는 과정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충분한 연습 없이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다 보면 결국은 학습의욕을 상실하게 되고 수학에 흥미를 잃게 된다.
많은 교사들은 중3 때 공통수학을 배운다고 해서 고교에 진학한 뒤 수학을 잘 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고1 때 수Ⅰ.Ⅱ에 몰두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한다.
고1 때 공통수학 과정을 충분히 다져놓지 않으면 그 다음 무엇을 배우든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수학은 처음 배울 때 개념 파악을 잘 해야 하는 과목이다.
첫 단계에서 어설프게 이해하거나 단순히 문제 풀이 위주의 패턴에 집중하다 보면, 수능시험에서 자주 다루어지는 다소 생소한 유형이 나오면 힘을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문제은행에서 출제되는 모의고사에서는 고득점을 하는데 실제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얻지 못하는 수험생들 중 상당수가 조기진도의 부작용에 빠진 경우다.
▲영어
어떤 의미에서 보면 영어는 조기진도라는 말을 적용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문법을 예로 들어보면 부정사, 동명사, 분사와 같은 준동사는 중학교에서도 배우고 고등학교에서도 배운다.
출제되는 문제의 어휘와 난이도에서 차이가 날 따름이다.
일부 학자들은 어린 나이에 외국어를 시작해야 2개 국어 동시 구사 능력이 배양된다고 주장한다.
중.고교생만 되어도 논리로 외국어를 배워야 하기 때문에 원어민 수준에 이르기가 어렵다는 것. 그러나 조기 교육이 지나칠 경우 오히려 많은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특히 취학 전 어린이의 경우 영어와 우리말의 어순과 논리 전개 방식 차이 때문에 모국어 구사 능력에 지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영어 조기 교육 열풍은 생산성 면에서의 진지한 검토가 필요하다.
현재의 취학전 아동의 영어 유치원과 중.고교생의 TOEIC, TOEFL, TEPS 열풍이 과연 시간과 돈을 투자한 만큼의 성과를 거두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이를테면 독해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뿐만 아니라 그 글을 이해할 수 있는 교양과 배경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문자 그대로의 해석은 가능한데 그 내포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수능 영어에서도 고득점을 하기 위해서는 영어 실력뿐만 아니라, 언어 영역에 적용되는 풀이 방법을 알아야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말 어휘 실력과 독해 능력이 없으면 고급영문의 해석과 이해도 어렵다.
일반적으로 저학년일수록 한군데 이상 학원에 다니는 경우가 많은데, 이곳저곳 다니다 보면 실제로 별로 얻는 게 없기 십상이다.
영어 교육 전문가들은 많이 벌려놓기 보다는 하나라도 제대로 이해하고 암기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한다.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서 본문만 다 암기해도 엄청난 학습이 된다는 것이다.
교과서에 나오는 어휘들을 영영사전을 통해 철저하게 정리하고 암기하면 학원 한 두 군데 다니는 이상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충고한다.
▲언어, 사회.과학
언어는 국어 교과서를 미리 가르치는 것보다는 일부 상류층 자녀들을 상대로 하는 논술, 철학, 독서지도 등이 문제되는 경우가 많다.
현재 일부 학원에서 고액의 수강료를 받고 논술과 심층면접 등의 강의를 하고 있다.
어린이와 중.고교생을 상대로 철학 강의와 독서 지도를 하는 경우 나이와 지적 수준을 고려하지 않고 지나치게 어려운 내용과 딱딱한 논리를 다루는 사례가 많다.
정도가 지나치면 독서가 주는 재미를 잃기가 쉽다.
초.중학생의 경우 논리보다는 작품을 통한 감수성과 직관력, 상상력의 배양에 힘쓰는 것이 나중을 위해 훨씬 도움이 된다.
많은 작품을 읽고 바탕 지식을 착실히 쌓은 다음 논리적 훈련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논술을 잘 하기 위해서는 글쓰기 요령에 앞서 많이 읽어야 한다.
다양한 독서를 통해 해박한 지식과 풍부한 경험을 쌓게 되면 글쓰기 요령은 쉽게 배울 수 있다.
심층면접이나 논술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평소 신문, 잡지 등을 통해 시사적인 쟁점들을 정리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교과서에 나오는 사회과목의 다양한 기본 개념들을 먼저 이해하고 나서 그 내용을 현실 문제와 접목시켜 사고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 바람직한 심층면접 대비책이다.
과학 과목의 경우 일부 사설학원에서 중학교 때부터 영재학교나 특목고를 목표로 어려운 과정을 미리 가르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런 과정들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할 경우 흥미와 학습의욕을 상실할 가능성이 높다.
심층면접에 대비한다며 대학 과정의 어려운 내용을 가르치는 학원도 있는데, 지금까지 여러 대학에서 출제된 과학과목의 기출문제를 검토해 보면 고교 과정을 벗어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따라서 교과서의 기본 내용을 먼저 이해하고 거기에 바탕해서 심화 학습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습이 더 효과적
조기진도는 일부 우수한 학생에게 다소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생에게는 역기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조기진도는 학교에서의 수업 집중도를 떨어뜨리기가 쉽고, 학습의욕을 상실하게 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처음 배울 때 철저히 이해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그 부분을 틀릴 가능성이 높다.
진도를 빨리 나가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학부모들이 먼저 깨달아야 한다.
무턱대고 학원에 보낸 뒤 다른 학생들보다 조금 더 빨리 배우는 것에 만족하는 것은 학부모로서 결코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다.
아무리 쉬운 단원이라도 충분한 시간을 들여 깊이 있게 이해하고 연습하는 자세를 갖게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이 예습이다.
학원에 가서 손쉽게 조기진도의 달콤함에 빠지기보다 어렵더라도 혼자서 예습하는 습관을 들이면 실력 향상에 훨씬 도움이 된다.
예습을 통해 새로운 내용에 대한 두려움을 줄일 수 있고 더 적극적으로 수업에 몰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김재경기자 kj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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