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 하는 오후

내가 건너온 물은 맑았다

그러나 그 물을 건너간 세월은 흐렸다

세월 속에서 꽃은 피었다 시들었지만

내 머물렀던 자리

그 주소들은 해독되지 않았다

그 많은 햇빛들을 낮이라는 말로 짧게 불렀듯이

그 모든 것을 삶이라는 말로 나는 무례하게 요약했다

명명할 수 없는 오후들이 이파리처럼 쌓여

내 발을 덮으면

나는 인생이라는 긴 문장 속에 그들을 가두어놓고

제독처럼 술 마셨다.

이기철 「오후는 이파리처럼 쌓여」부분

현대 지식인의 시로 쓴 참회록이다.

유리처럼 투명하게 삶을 영위 못한 자책 섞인 페이소스가 담담하게 흐르고 있다.

좀더 순수하게 치열하게 존재에 접근하지 못하고 개념적 언어로 삶을 가둬놓고 제독처럼 술을 마신 자기 탄식을 고해성사처럼 펴 보이고 있다.

권기호(시인, 경북대 명예교수)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