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부양을 받아야 할 조부모와 손자녀들이 오히려 보호.부양의 책임을 떠맡아야 하는 조손 가정은 편부.편모 가정, 홀몸노인 가정, 소년소녀가장 가정과는 또다른 어려움을 안고 있지만, 복지 당국의 대처는 전무하다.
◇어느 손자의 편지
제 이름은 은식이(가명)예요. 대구 대명동에 사는 12살된 초등학교 5학년생입니다.
저희 집은 친구들 집과 조금 달라요. 엄마 아빠가 안 계시거든요. 저는 할아버지(70) 할머니(67)와 셋이서 살아요. 숙제를 봐 주시는 복지관 선생님은 저희 같은 집을 '조손 가정'이라 부른대요.
부모님 얼굴은 기억이 안납니다. 엄마는 절 낳은 뒤 위암으로 3년 정도 고생하시다가 하늘나라로 가셨대요. 전 백일 때부터 할머니 손에서 컸고요. 아빠는 재혼하셨다가 얼마 전 그 아줌마와도 헤어졌다고 할머니가 그러셨어요. 할머니도 하도 연락이 안돼 호적인가를 떼보고 아셨대요. 엄마 사진은 얼마 전 처음 봤습니다. 할머니가 사진첩을 펼치고는 "이 사람이 니 엄마다" 하셨습니다. 전엔 이모 사진이라고 하시더니…
학교 끝나면 태권도 도장 다니는 동네 친구들이랑 놀아요. 가끔 친구네 엄마가 맛있는 피자나 돈가스를 시켜 주시거든요. 집에선 김치.된장.나물이 전부이지만 저는 반찬 투정은 안해요. "돈이 있어야지" 하며 할머니가 한숨 쉬시니까요. 점심은 학교에서 급식을 타 먹어요. 아침에 용돈으로 500원 받으면 200원만 쓰고 돌려 드려요. 그럴 때면 "너거 아빠.엄마 손에 컸으면 훌륭한 사람이 될 건데…" 하시며 할머니가 제 머리를 쓰다듬으십니다.
답답할 때도 많아요. 수학 숙제하다 모르는 걸 물으면 할머니가 고모한테 전화까지 한다니까요. 우리들이 사는 방은 반지하예요. 곰팡이 냄새가 많이나고 비도 새고 화장실도 밖에 있어요. 그래서 "우리도 아파트 살자"고 했더니 할머니가 또 한숨을 쉬셨어요.
할아버진 병원에서 쓰레기를 치우며 한달에 50만원을 받는대요. 젊으실 때 열차사고로 크게 다치신 할아버진 밤마다 술을 드셔야 주무실 수 있어요. 할머니도 제 용돈을 주기 위해 종이상자를 주우세요. 얼마 전 야단 맞고 많이 운 뒤로 할아버지는 절 심하게 야단치는 일이 없어요. 그저 좋은 친구 사귀라고만 하세요. 제 소원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건강하게 오래 사시는 것이예요.
◇나중엔 누가 우리 손자 돌봐줄까요?
대구 대명동에 사는 영태(가명.12) 영철이(가명.11) 할머니입니다. 애들을 맡아 키운지가 벌써 6, 7년 됩니다. 택시기사를 하던 아들은 빚 독촉에 시달리다 집을 떠났고 며느리는 그 전에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가끔씩 아들이 집으로 전화를 걸어 애들 안부를 묻곤 할 뿐입니다. 지금 어디서 뭘 하는지…
예전에 애들은 던져만 놔도 혼자서도 잘 컸지만 요즘은 키우기가 너무 힘드는군요. 저도 일흔 여덟 해를 살고 보니 몸 이곳저곳 아프지 않은 데가 없습니다. 그러니 처음엔 참 막막했어요. 두 녀석이 밤마다 오줌을 싸 야단도 많이 쳤어요. 그럴 때마다 형제가 마주 앉아 우는 모습이 어찌나 짜안 하든지…
돈이 제일 큰 걱정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반 지하방 사글세는 100만원인데, 기한이 한달이나 지나버렸습니다. 복지관에서 도배를 해 줘 다행이지만 그 전에는 바퀴벌레가 기어다니고 곰팡이 냄새가 심해 애들이 질겁을 해댔지요. 그렇다고 내가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매달 나라에서 나오는 50만원으로 세 식구 입에 풀칠이나 하고 삽니다. 기름 한 드럼을 넣고 진 빚 14만원도 못갚고 있지요.
작은 놈은 얼마 전부터 친구한테서 '롤러'(스케이트)를 빌려와서는 옥상에서 타고 다닙니다. 집 주인이 뭐라 할까, 골목에서 타게 하면 위험할까 싶고 타지 말라 해도 통 듣질 않네요. 제 부모가 있으면 하나를 사주든지 따끔하게 야단치든지 할텐데…
애들 가르치는 일도 걱정입니다. 학원 보내야 한다고 하지만 그럴 형편이 안돼 한 달에 9만원 주고 동네 미술학원 선생님한테 숙제 정도 봐 달라고 맡겨 놨습니다. 큰 놈은 아침 7시에 일어나서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학교 가는데, 그렇게 일찍 가서 뭘 하는지 몰라요. 용돈 달라, 장난감 사 달라 조르지 않아 다행이긴 하나 애들 마음이야 다 똑같지 않겠습니까? 제가 가고 나면 누가 이 애들을 키워 줄까요?
◇무엇이 필요하나?
조손 가정은 당국의 직접 관심 대상에 오르지 못해 정확한 규모조차 파악돼 있지 않다. 대구 남구사회복지관 자체 조사로는 남구에만 47가정 113명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현재까지 복지 당국은 조손 가정을 '노인 가정'으로만 파악, 손자녀 양육에 필요한 경제적.교육적 지원은 않고 있다. 적절한 지원책이 연구돼 있을리 만무한 실정인 것.
이때문에 복지 관계자들은 당국의 기초조사가 선행되고 그에 따라 적합한 지원책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대구노인종합복지회관 김상근 관장은 "최근 2세대(아버지.어머니)의 사망.이혼.가출.양육포기 등으로 인한 가정 붕괴가 심각하지만 조손 가정에 대한 연구는 부실하다"며, "생계비 외에 손자녀 교육을 위한 경제적 지원과 다양한 정보 및 참여 프로그램 제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구 서구제일종합복지관 정재호 관장은 "사회 여건 변화로 조손간 갈등의 여지가 더 많아진 만큼 복지관들이 기존 방과후 프로그램에서 조손 가정만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을 운영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경운대 이경은 교수(아동복지학)는 "조손 가정 손자녀를 방치하면 이혼가정 자녀들과 유사한 심리적 소외감이 나이에 걸맞잖은 어른스러움이나 얌전함, 자긍심 부족, 공격성 등을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따라서 이 교수는 우선 서울.대전 등에서 운영 중인 교내 '학교 사회사업가' 제도를 도입해 조손가정 아동들을 1대 1로 돌보게 하는 등 학교의 역할을 높일 필요가 있고 각 복지관에서도 자원봉사자들이 후견.상담을 맡는 멘토링(mentoring) 프로그램을 시행토록 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최병고기자 cb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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