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마지막 천원

벌써 몇 년 전이 되어버린 일이다.

한겨울에 후배 하나가 객사한 슬픈 일이 있었다.

발견 당시 만취 상태였고 그 해 가장 추운 날이었을 것이다.

평소 그리 두터운 친분이 있었던 후배는 아니었지만 당시 많은 연극인들에게는 하나의 충격이었다.

결국 우리도 저렇게 갈 수 있구나 하는 자괴감으로 한동안 연극계는 우울하기만 했다.

그 후배의 지갑 안에는 달랑 천원짜리 한 장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만원도 아닌 천원짜리 한 장이. 이 후문을 들은 나는 은행이라도 털고 싶었던 내 어두웠던 젊은 시절이 떠올랐고, 우리 연극계의 빈곤을 상징하는 듯해서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런데 한 가지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그 후배는 왜 그 돈을 쓰지 않고 남겼을까. 삶의 흔적으로? 아니면 내일을 위해서? 이런저런 망상을 하다 보니 아마도 그는 그 마지막 천원을 어찌 써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결론 아닌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랬을 것이다.

아마 그는 자살 같은 것은 꿈꾸지도, 게다가 객사할 것이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 남은 천원짜리 한 장을 놓고 고심했다면, 그는 누구보다도 살려는 의지가 강렬했다는 뜻이다.

인간의 생에 대한 의지는 어쩌면 원자폭탄이 터지는 순간에 발산되는 그 섬광보다도 강한 빛일지도 모른다.

지옥에 떨어져도 살 의지를 갖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 아닐까. 그러한 열정이 있기에 우리는 숱한 절망의 강을 건너면서도 난파된 마음을 부여잡고 앞을 응시한다.

이제 5월이 세월의 블랙홀 속으로 사라지려 한다.

이제 다시는 2003년 5월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남는 것이 있다.

우리가 5월을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희망하고 절망했는지, 그 추억은 마음 깊이 각인될 것이다.

세월감을 누가 막으랴만 내 주머니에 천원짜리, 아니 백원짜리 동전 하나 달랑 남았다는 생각으로 우리는 다시 6월을 맞이해야 할 것이다.

왜? 새로운 시작은 비움에서 비롯되니까. 술자리에서 늘 말없이 앉아 있던 그 후배가 살아있다면 내 말에 미소로 동의하지 않을까.

최종원(한국연극협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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