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간 데스크-그 여름의 전설

월드컵대회가 열린 지난해 여름, 한국은 감동과 열정으로 뒤덮였다.

영일없는 정치 사회적 갈등과 반목으로 피곤하게 굴러가는 한국을 일시에 화기와 용기가 어우러진 빛나는 대~한민국으로 돌변시켜 놓은 뜨거운 여름이었다.

개막 전만 해도 숙원의 1승, 그것만으로도 성공이고, 욕심을 내자면 개최국 체면도 있고하니 16강에만 들어준다면 대성공으로 환호작약할 준비가 돼 있던 축구팬들이었다.

그러나 기적처럼 4강에 올랐다.

히딩크와 태극전사, 그리고 붉은 악마와 국민들이 함께 만든 기적이었다.

경기장은 물론이고 서울시청앞 광장을 비롯하여 대구 범어네거리와 공원, 시골의 넓은 공터까지 전국을 뒤흔든 거리 응원단은 연인원 2천여만명. 누가 입어라고 권유하지 않았어도 하나같이 'Be the Reds' 붉은 유니폼을 구해 입었다.

태극기를 손에 들고 또는 망토처럼 둘러쓰고, 스카프처럼 머리를 감싸고, 치마처럼 허리에 두르고 거리에 나갔다.

페이스페인팅에 보디페인팅까지. 항상 높게 매달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던 태극기가 일순에 자랑스럽고 친근한 캐릭터처럼 젊은이들 사이에 내려왔다.

골이 터질 때마다 경기장, 거리에서 온 동네가 떠나갈듯 터져나온 감격의 대~한민국. 예선 첫승에서부터 16강 8강 4강으로 가면서 붉은 행렬은 더욱 거대해지고 함성은 더욱 우렁찼다.

솔직했다.

가식없이 울고 웃고 함께 '대~한민국'을 노래했다.

◈새로운 한국인 모습

그런 모습은 전통적인 한국인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작은 이익에도 아귀다툼을 하는 일상적인 꾀죄죄한 모습이 아니었고, 격식과 권위로 무장한 경직된 모습이 아니었다.

애국이란 민주화투쟁하듯 통일운동하듯 작심하고 나선 목소리 큰 사람들의 전유물인양 치부돼온 근래의 풍토를 완전히 뒤엎는 통렬한 반동이었다.

때묻지 않은 젊은이들, 소리없는 보통사람들이 자연발생적으로 표출한 나라사랑, 이웃사랑, 그리고 인류애의 모습이었고 그것은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한국인의 모습이었다.

혹자는 한국인의 전통적인 신명이 되살아난 것이라고 분석했지만 그것은 전통이라는 옹색한 그릇에 넣어 재단할 성격을 넘어선 것이었다.

레드컴플렉스를 극복했다는 칭찬도 구세대의 구차한 사족일 뿐이었다.

붉은 악마는 고단수들이 득실거리는 정치판, 특히 치열한 대선 가도에서 전혀 유혹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누구를 사랑하는 모임이나 누구를 미워하는 모임 같은 데는 관심이 없었다.

대한민국의 축구를 사랑할 뿐이다.

거리응원에 동참한 대선 후보들이 초라하게 보일 정도로 그들은 당당했고 순수했다.

또 그들은 그들의 이름이 엄청난 부가가치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업적 이용을 거부했다.

그 리더라면 유명인 반열에 오른들 전혀 어색하지 않았을 터임에도 매스컴의 화려한 조명을 원치 않았다.

사심없는 그들은 사상 최대의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현실에 급급해 옹졸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꿈은 이루어진다'며 잃어버리고 있던 꿈을 일깨워주었다.

그들의 응원가는 대한민국 미래에 대한 희망가였다.

누구도 강제하지 않은 전혀 새로운 분위기로 새로운 기상을 뿜어내는 그들은 새로운 한국인이라고 할 만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먼곳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 이웃에 살고 있는 젊은이들이었다.

◈사라진 붉은 기상

기성세대들은 당연히 이들의 열정이 만든 월드컵 4강의 엄청난 국민적 에너지로 국가브랜드를 세계에 드날리고 경제적 상승효과를 크게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기대했다.

그러나 예의 그랬듯이 기대는 기대로만 남았고 1년사이 정치 사회적 파열음과 대립은 더욱 심화됐고 경제는 외환위기 때보다 더 나빠졌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월드컵이 한창이던 그해 6월 13일 발생한 여중생 사망사건은 월드컵이후 촛불시위, 반미시위로 이어져 대선의 추악한 정쟁과 에스컬레이터되면서 불행히도 월드컵의 열기를 조기냉각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기성세대는 무심했다.

그 이후 오늘까지 갖가지 정치적 외교적 사회적 혼란, 이념간 세대간 계층간 대립과 갈등은 유례없이 증폭되고 있다.

최근의 화물연대를 비롯한 각종 노조의 파업사태나 교육계의 혼란과 대립 등 줄을 잇는 이해집단의 목소리는 끝간데 없이 이어지고 있고 새 정부는 최소한의 조정 통제력도 발휘못하는 지리멸렬한 모습이다.

전국민이 신나는 승전가를 부르듯 그 여름의 감동을 되살릴 리더십은 없는가.'꿈은 이루어진다'는 역동적이고 아름다운 메시지를 던지고 사라진 그 여름은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 여름은 전설로 묻일 수 없다.

김재열 특집기획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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