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꽃이 지기로서니…'

조선조 명종(明宗) 대의 윤원형(尹元衡)은 권력을 잡고 있을 당시 언제나 문전에 뇌물이 산적해 있었다 한다.

집에서 기르는 소와 말에까지 진귀한 음식을 먹였다는 일화도 전한다.

그는 중종(中宗)의 둘째 계비였던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인데다 사화를 일으켜 반대파의 기세를 모두 꺾어 놓았기 때문에 그야말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사정이 달라졌다.

실각의 운명을 피하지 못했으며, 관작을 박탈당하고, 끝내 강음(江陰)의 외딴 곳에서 불행한 최후를 맛봐야만 했다.

▲'십년 세도 없고 열흘 붉은 꽃이 없다'는 '권력무상(權力無常)'을 비유한 우리 속담 중의 하나다.

요즘 정치판의 부침을 보면 절실히 와 닿는 말이다.

정치인들의 비운(悲運)은 권력무상에 아랑곳하지 않는 데서 비롯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정치인이 배우에 비견되는 까닭도 연기를 하며 인기를 먹고 산다는 데 있을 게다.

퇴장이 멋져야 명배우로 갈채를 받듯이 정치인도 끝맺음이 산뜻해야 평가받게 마련이다.

▲대북 송금 의혹 사건과 관련해 구속 수감된 박지원(朴智元)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 영어의 몸이 되기 전에 심경을 묻는 기자들에게 남긴 말이 화제다.

그는 "꽃잎이 진다고 어찌 바람을 탓하겠습니까. 차에 띄워 마시고 살겠습니다"라고 소회를 밝혔기 때문이다.

좌초 위기에 놓인 '햇볕정책'을 '꽃'으로 표현한 것 같고, 권력을 그렇게 비유하고 그것을 잃으면 바로 배신하는 세태를 '바람'으로 비유한 것도 같다.

▲하지만 이 비유법을 두고 곱지 않게 보는 시선이 많은 건 '왜'일까. 당대를 준열하게 살다간 지조(志操)의 시인 조지훈(趙芝薰)의 시 '낙화(落花)'의 첫째 연 '꽃이 지기로서니/바람을 탓하랴'를 그대로 인용한 게 과연 적절하고 설득력을 얻을 수 있느냐 하는 점이 문제다.

연기치고는 그럴듯한 연기지만, '휘두른 사람이 휘둘린다'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시각이 없지 않은 게 사실이다.

더구나 다른 세상에 있는 조지훈은 이 비유를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는지 궁금하다.

▲'낙화'는 둘째 연부터 이렇게 이어진다.

'주렴 밖에 성긴 별이/하나 둘 스러지고//귀촉도 울음 뒤에/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꽃이 지는데//꽃 지는 그림자/뜰에 어리어//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묻혀서 사는 이의/고운 마음을//아는 이 있을까/저어하노니//꽃 지는 아침은/울고 싶어라'. 애써 태연한 듯한 박 전 장관도 '권력무상'이라는 사실 앞에서 이 시의 마지막 연과 같이 울고 싶은 심경임에는 틀림없으리라. 아무튼 그는 이제 역사의 심판대에 설 수밖에 없게 됐다.

이태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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