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KGB 고려익스프레스 전영희 사장

KGB 고려익스프레스 전영희(46) 사장은 이삿짐 운반업체에서는 보기 드문 주부 경영자. 창업 전엔 아는 것이라곤 집안 일이 전부였던 '솥뚜껑 운전사'였다.

그리고 실직자의 아내로 4년여 고생했다.

그러나 전 사장은 '이판사판 창업' 10년 만에 구멍가게 수준의 이삿짐 운반업체를 지점 5개 거느린 유명 업체로 키워 냈다.

화물차·사다리차를 한 대씩 사 창업했지만 이젠 수천만원짜리 차량만 10대가 넘는다

지점당 월 매출은 1천500만원 가량. 함께 시작했던 남편은 사업 규모가 커진 뒤 보관물류 및 택배사를 만들어 5년여 전 독립해 나갔다.

"창업 당시 대구·경북엔 포장 이사라는 개념이 자리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냥 인부 몇 사람 부르고 트럭 한 대 빌려 옮기는 수준이었지요. 가재도구 깨지고 운반 인부 접대하느라 신경 쓰고…. 이사가 고역이던 시절이었습니다.

우리 회사는 이사의 개념을 '편한 것'으로 바꿔 놨습니다.

그것이 주효했습니다".

전 사장은 창업 후 첫 이삿짐을 옮기던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고 했다.

양식마저 걱정해야 하던 살림살이에다가 '대박'을 터뜨려 너무도 감격스러웠다는 것. "1991년 10월 창업 첫날 대구 월성동 아파트단지에서 28만원을 벌었습니다.

직장생활 때의 남편 월급이 100만원이었지요. 그 4분의 1을 하룻만에 만진 것입니다.

너무나 가슴이 벅차 사다리차에 올라 엉엉 울었습니다".

남편은 1981년 결혼 후 7년 만에 포항의 한 개인회사에서 실직당했다고 했다.

살 길 찾아 서울행. 세간 들여 놓을 곳도 없이 네 명이 누우면 딱 맞는 6평짜리 지하 단칸방. 세 식구가 가장의 성공만 기다리고 있었으나 역시 실패였다.

1990년 대구로 돌아왔지만 되는 일이 없었다.

남편이 직장을 구하면 그 회사가 이내 부도 나 또 보따리를 싸야 했다.

그 때쯤, 건축업을 하던 친척이 차량 임대업을 해보라고 권했다.

건축 공사장의 자재 운반용 사다리차를 사 임대하라는 것. 염치불구하고 친정에서 당시로서는 거액인 2천만원을 끌어 와 사다리차를 샀다.

그러나 그것도 실패. 얼굴을 들 수 없어 친정 발길도 끊어야 했다.

"매일신문이 행운의 열쇠가 됐습니다.

아파트단지를 다니던 중 신문 지국장이란 분이 아파트 입주 현장에 가 보래요. 우리가 갖고 있던 사다리차로 이사를 도우란 것이었지요. 혹시나 했지만 그 분 말이 딱 들어맞았습니다".

마침 당시 대구시내에서는 아파트 입주가 한창이었다.

월성·상인·지산·범물 등에서 고층 아파트 이사 물량이 쏟아졌다.

6개월 만에 빌린 2천만원을 갚고도 수백만원이 남았다.

드디어 이삿짐 운송업이 성공한 것이었다.

물론 늘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창업 4년 만에 작업 인부 사망 사고가 났다.

이웃들은 보상을 걱정해 문닫을 각오를 하라고 했다.

하지만 전 사장은 그 고비를 돌파했다.

"그 분의 죽음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회사가 죽을 순 없었습니다.

창업 전 고생을 떠올렸습니다.

그대로 주저앉으면 내가 죽을 것 같았습니다.

사고 처리를 빈틈 없이 해냈습니다.

그 후 사고에 더 조심하게 됐으니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된 셈입니다".

전 사장은 작업 인력으로 아르바이트생은 쓰지 않는다고 했다.

책임감 있는 직원만이 일을 제대로 해 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일단 고용한 직원에게는 최대한 성심성의를 다하려 노력한다고 했다.

식사를 손수 준비할 정도. 그래야 현장 직원들도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다.

이런 신념이 전 사장의 회사를 성공으로 이끄는 것 같았다.

전 사장은 '멋 모르고' 이삿짐 운송업에 뛰어들었지만 다른 사람에게도 괜찮은 창업 아이템일 것이라고 했다.

이사 수요는 늘 있는 만큼 몸만 조금 고되면 충분히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얘기였다.

전 사장은 이제 베풀며 살고 싶다는 얘기도 했다.

서민들을 위해 실비만 받고 이삿짐을 옮겨주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053)382-7300.

최경철기자 koala@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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