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평생 미혼...자식은 20~30명

한 알 두 알 세 알… 박다남(62) 할머니는 오늘도 묵주를 꿰느라 쉴틈이 없다.

할머니뿐 아니라 마을의 다른 할머니들 손길도 요즘 들어 모두 바빠졌다.

돋보기를 벗고 묵주를 헤아려 보는 할머니들의 모습은 무척 흥겨워보였다.

◇설립 40주년 맞는 대구 SOS어린이마을

할머니들이 사는 집은 대구 SOS어린이 마을(검사동). 이 마을이 오는 10월로 설립 40주년을 맞기때문에 할머니들은 마을 후원자들에게 팔찌 묵주, 목걸이 묵주를 선물하겠다고 이같이 나선 참이다.

대구 SOS어린이마을은 홀로 어렵게 살아야 하게 된 어린이들로 가정을 꾸려 어른이 될 때까지 양육하는 시설. 나이 차가 형제처럼 나게 구성된 가정에 '평생 결혼 않고 봉사하겠다'는 금혼서약을 한 '어머니'들이 인연을 이뤄 평생을 부모 자식으로 지낸다.

고아원들과는 전혀 다른 형태인 것.

의사 출신의 오스트리아인 헤르만 그마이너가 2차대전 후 전쟁고아 보호를 위해 1949년 최초로 설립했고, 현재 전세계 130여개국에 각국 본부를 두고 있다.

한국에는 1963년 천주교 대구대교구 주도로 본부가 대구에 만들어졌으며, 1982년 서울.순천에도 마을이 설립됐다.

5천여평 부지에 15채의 주택을 마련한 대구 마을에는 현재 3~18세(대학생 7명 포함)의 어린이.청소년 97명이 13명의 어머니들 아래 각각의 가정을 구성해 별도의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울.순천의 마을에는 25명의 어머니들 아래 230여명이 가정을 꾸리고 있다.

대구에서는 올해까지 500여명이 성장해 독립해 나가고 14명의 어머니들이 정년인 55세를 맞아 은퇴해 별도의 집 두 채에서 함께 살고 있다.

각각 20~30명씩의 자식을 길러낸 장한 은퇴 어머니들의 집은 현역 어머니들의 집 뒤편에 마련됐다고 해서 '뒷집'으로 불린다.

◇26세 처녀와 12세 큰 딸

박다남 할머니는 아들 딸 손자녀 자랑에 흥이 나 했다.

"다 우리 아들네 딸네 사진이예요". 25세 처녀 때이던 1966년 고향 울릉도에서 수녀가 되려 무작정 대구로 왔다가 이 마을에서 평생을 보냈다는 할머니 방엔 각기 성이 다른 아들.딸의 결혼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지난달 4일 "자식들이 졸라서" 찍었다는 진갑연 사진도 함께 했다.

그러나 할머니가 보여 준 진짜 보물은 은퇴 때까지 30년간 길러낸 '자식' 38명의 기록이 고스란한 대학노트 2권이었다.

'김영자(가명), 1955년 7월생, 1982년 결혼, 83년 7월 큰 아들 출생, 86년 슈퍼마켓 시작, 88년 사위 운전면허 획득, 90년 2월14일 손주 유치원 졸업…'. 와서 처음 만났던 당시 12세의 큰 딸 이력. 첫 '월급' 3천원으로 2천700원이나 하는 '바바리'를 사 입어 버릴 만큼 물정 몰랐던 처녀 엄마를 "아줌마"라 불러 버려 가슴 철렁이게 했던 맹랑한 아이는 벌써 중년이 됐다.

"답답할 때도 많았지요. 사춘기에 접어든 영자가 고아에 관한 얘기를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듣고는 말문을 닫아버려 혼쭐이 나기도 했습니다". '철없던 엄마'는 그 동생들 뒷바라지 탓에 맏딸을 대학까지 보내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장롱 깊숙이 숨겨둬야 했던 큰 딸의 대학 합격증이 늘 가슴을 싸 하게 만든다고.

9세에 받아 14년간 길러 지난 1월 초 시집 보낸 31번째 딸 정화(25.가명)씨의 결혼식 때는 딸의 친아버지 뒤에 숨어 지켜봐야 했다고 말했다.

"아이의 의붓엄마나 시댁식구들이 보면 오해할까 봐서". 그래도 신혼여행 갔다 와서는 몸이 아프다고 해 찾아가 살림 다 챙겨 주고 왔다고 했다.

노트장을 넘기던 할머니의 손가락이 어느 순간 딱 멈췄다.

'우기철. 사망. 1975년 6월27일, 금호강에서 익사'. "지금 살았으면 37살인가…". 할머니는 돋보기를 벗고 한동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은퇴해도 영원한 엄마

박 할머니 평생에 남은 건 자식들. '내 자식 키우면서 황송하게도 받았던' 월급은 아이들 뒷바라지에 쓰였고, 약간의 '퇴직금'은 출가한 자식들에게 요긴하게 쓰인다고 했다.

박 할머니에겐 요즘 채전밭에서 상추를 키워 독립해 나간 자식들에게 보내는 일도 꽤 만족스러운 듯했다.

"아직도 줄 게 있어 다행이지".

'뒷집' 최고참인 안순이(69) 할머니는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고, 은퇴해도 어머니들은 늘 출가한 자식들 걱정이라고 했다.

이혼한 자식, 사업이 어려운 자식, 시집 가 힘들어 하는 딸, 음주사고 낸 아들, 나이 마흔 가깝도록 장가 못 간 아들까지… 그래도 영국 가 일류 요리사로 있다는 아들, 아파트 평수를 늘려 이사했다는 딸의 소식을 듣거나, 손자.손녀가 찾아 오면 근심들도 저만치 날아간다고 했다.

기자가 찾아 가 있을 때 때마침 예기치 않은 손님이 안 할머니를 찾아 왔다.

옆 집 이순자(69) 할머니의 딸인 40대 중년의 인숙(가명)씨가 "아줌마"하며 문턱을 들어선 것. 벌떡 일어 나 반갑게 맞은 안 할머니는 그러나 다짜고짜 주문부터 내놨다.

"니 우리 상철이 중신 좀 해라". 친정 온 질녀 맞는 숙모 모습에 전혀 다르지 않았다.

"외손녀가 여기 왔다 가서는 '다른 친구 외갓집은 잘 사는데 왜 우리 할머니는 가난하냐'고 묻더라는 거예요". 허허 웃는 옆집 이복남(68) 할머니는 외손녀 이야기에서 자식들의 어릴 적 일들이 다시 생각나는 듯했다.

가출한 아이를 찾아 동촌.대구역 일대를 쫓아다니던 일, '아이가 고아라는 이유로' 중매를 부탁하면서 늘 기죽어야 했던 일들 하며….

이 할머니는 요즘도 한 달에 몇번은 외출해야 한다고 했다.

맞벌이 하는 자식들에게 밑반찬과 김치를 만들어 나눠줘야 한다는 것이다.

최병고기자 cb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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