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가야제국 가운데 맹주...태동시점은 학설 구구

한국 고대사에서 가야(加耶)는 한동안 '왕따' 대접을 받았다.

천년을 훌쩍 넘긴 뒤에도 신라는 영남에서, 백제는 호남에서 집중 조명을 받았다.

저 멀리 만주벌판을 달렸던 고구려의 기상도 후손들이 관심을 가지기엔 매력이 컸다.

그러나 가야는 달랐다.

패배한 역사에 관심을 두는 이는 드물었다.

더구나 관련 유물이나 기록도 일천해 고대에 잠시 스쳐 지나간 소국(小國)으로 치부돼왔다.

뒤늦게나마 가야 무덤에서 옛 유물이 쏟아지면서 관심이 쏠리고 있다.

도대체 가야의 역사는 어떠했길래 여태 제 모습을 찾지 못하고 푸대접을 받아 왔을까. 가야는 언제 생겨나 언제 사라진 나라인가.

학계는 가야제국의 맹주국, 대가야가 562년 신라에 병합됨으로써 그 역사는 막을 내렸다는데 별 이견이 없다.

그러나 그 태동 시점에 대해서는 견해가 크게 엇갈린다.

우선 '삼국유사'의 수로왕 건국연대(기원후 42년)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학자는 거의 없다.

건국신화 자체의 속성상 기년(紀年)은 다분히 인위적인 탓이다.

특히 연대를 추정할 근거가 마땅찮아 논자에 따라 가야의 성립시기가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300년까지 무려 500년 가량 편차를 보이고 있다.

이는 가야의 모태인 삼한시대(마한, 진한, 변한) '변한'을 가야 이전의 역사(前史)로 볼 것이냐, 아니면 가야사 전기(前期)로 볼 것이냐의 인식 차이에서 주로 비롯됐다.

경북대 주보돈(사학) 교수는 변한을 가야의 전사(前史)로 보고 변한 소국명의 변화, 시대적 용어로서의 '삼한' 소멸, 삼한 지배층 호칭변화 등을 근거로 가야성립기를 3세기 말, 4세기 초로 보고 있다.

계명대 노중국(사학) 교수는 1세기~3세기말 사이를 소국 단계의 가야성립기로 파악했으며, 고 김철준(서울대 국사학) 교수는 신라와 비교해 건국 기년과 세계(世系)를 조정, 3세기 중엽을 소국으로서의 금관가야 성립기로 보고 있다.

부산대 신경철(고고학) 교수도 삼한시대를 국가가 아닌 '國'의 시대로 보고, 3세기 후반 나무널무덤(木槨墓)의 등장을 국가성립의 주요 지표로 삼아 변한과 가야의 구분 시점으로 4세기 초에 주목하고 있다.

반면 변한을 가야사의 연장으로 본 홍익대 김태식(역사교육학) 교수는 가야 기년 추정의 상한선을 42년으로 잡고, 2세기 후반 이전을 구야국(狗邪國), 즉 가야 성립기로 봤다.

이 근거로 3세기 전반의 사정을 다룬 중국 사서 '삼국지(三國志)'에 구야국이 언급되고 있는 점을 내세웠다.

이에 앞서 고 천관우 선생은 수로왕의 건국연대인 임인년(壬寅年)에 의미를 부여한 뒤 신라 전신인 사로국의 변화와 관련지어 구야국 성립연대를 2세기 중엽(162년)으로 봤다.

고 이병도(서울대 사학) 교수는 고조선 마지막 왕조인 위만조선이나 중국 진(辰)국 등 주변 정치세력의 동향을 고려해 부족국가로서의 가야 성립시점을 기원전 2세기로 꼽았다.

학계의 견해를 종합하면 대체로 변한을 가야사의 일부로 인식할 때 가야의 성립은 기원전 2세기~기원후 2세기 후반, 삼한시대와 가야를 구분할 경우 3세기 말~4세기 초를 가야의 출발점으로 볼 수 있다.

결국 가야는 최소 300년, 최대 700년을 이어온 국가인데도 그동안 그 역사만큼의 정통성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셈이다.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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