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망대-우리는 데모도 못해요

'사라진 목숨들, 깊은 슬픔, 연기를 내뿜는 구덩이, 엿가락처럼 휘어진 금속들, 만신창이가 된 생존자들, 유족들, 이루다 형언할 수 없는 비극'. 얼마 전 출간된 힐러리 뉴욕주 의원의 저서'살아있는 역사'에서 9.11테러를 묘사한 대목이다.

지난 2월 18일 대구 지하철 참사가 있었던 그 날의 모습도 이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지하철 참사는 벌써 잊혀져 가고 있는 듯하다.

지난달 말에는 우여곡절 끝에 사망자에 대한 합동 영결식도 있었다.

그들의 넋을 위해 살아있는 자들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의식이었다.

이로써 지하철 참사는 국민 성금으로 마련한 사망자와 부상자에 대한 특별위로금 문제만 남기고 수습이 되게 되었다.

참사로 희생된 그들의 고통을 우리는 알 수 없다.

형언키 어려웠을 고통마저도 그들은 말없이 끌어안고 가버렸다.

그들이 끝맺지 못했던 인생을 두고 우리는 아무 말을 할 수 없다.

하늘보다 높고 지구보다 무거울 그들이 못살다간 인생의 가치를 가늠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이 남기고 간 유족들의 슬픔이 그들이 겪었을 고통과 못다 살다간 생의 가치를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넋을 달랠 말이 우리들에게는 부족한가보다

또 하나의 안타까움. 지하철 참사의 부상자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사고에 대한 공포, 장래에 대한 불안 등이 그들의 얼굴에 짙게 배여있었다.

"우리들은 사망자들에 가려 사회적으로 관심을 끌거나 위로를 받은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저렇게 '거창한' 영결식은 아니더라도 신음하고 있는 부상자들도 있다는 것을 알아나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30대 후반 어느 아주머니의 장탄식이다.

참사에는 분명 사망자도, 부상자도 있기 마련인데 그들은 왜 잊혀지고 있는가. "쇠똥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데… 당신들은 목숨을 건지지 않았느냐"라는 한마디가 이들을 무관심으로 몰아 넣고 있다.

산 자와 죽은 자에 대한 우리 사회가 가진 의식의 한 단면이다.

그러나 "살아도 산 것이 아니라"는 부상자들의 한마디는 우리의 폐부를 찌른다.

이런 말도 한다.

"차라리 죽었으면 세월이 가면 잊혀지기라도 하련만……, 남편의 신음소리에 밤마다 울고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죽음보다 깊은 고통을 끌어안고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면 당신들도 데모도 좀하고 사회적으로 관심을 끌도록 하세요"라고 했다.

그들은 사망자 유족 앞에서는 차마 그것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린 하고 싶어도 못합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데 어떻게 데모를 합니까". 또 "살았으면 다행인줄 알아야지…"라는 차가운 시선도 두렵다고 했다.

기도(氣道) 화상으로 말을 못하게 된 남편을 대신한 중년 부인의 하소연은 더욱 안타깝다.

말을 못하는 것은 그렇다치고, 운영하던 피자 가게도 못하게 되었단다.

항상 뜨거운 열기가 있는 피자 가게에서는 그 화기(火氣)를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다.

말끝에, 보상이라도 넉넉히 받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뭔가 해서 살아보겠는데 라면서 한숨지었다.

어느 젊은 여성은 결혼을 포기했다고 한다.

사고 당시 일시에 마셔버린 유독가스가 인체에 미칠 영향을 알 수 없어서란다.

극단적으로는 기형아를 출산할 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그들을 불안 속으로 몰아 넣는 것이다.

이는 단지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런 불안이 기우(杞憂)로 끝나기를 빌 뿐이다.

그러나 사고당시 받은 정신적 충격과 함께 그들의 삶에 대한 불안은 쉽사리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삶은 현실적으로 돈으로 환산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는 듯하다.

인생은 역시 돈인가 보다는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그러나 망가진 삶을 보상하고 남아있는 상처의 고통을 달래고 그들이 마지막 의지할 수 있는 것도 돈인가 보다하고 수긍을 하게되는 것도 역시 우리 범부의 생각이다.

이미 가버린 자들의 고통은 남겨진 유족들에게 돈으로 보상된다.

그러나 부상자들에 대한 보상은 고통을 겪고 있는 본인들에게 직접 돌아간다.

상해보험과 생명보험의 차이다.

"때로는 상해보험의 보상이 더 큰 경우도 있다는 데…". 참사의 그늘에서 상처입고 고통스러워하는 그들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더 보상해 주는 것이 우리 살아있는 자들의 할 일 아닌가.

이성환(계명대 교수 일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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