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장한 무사가 쇠도끼를 높이 쳐들자 여덟살배기 소녀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주변에선 어느 누구도 감히 말릴 수 없었다.
이 소녀는 한 켠에서는 서슬 퍼렇게 그렇게 영문도 모른채 짧은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죽은 왕을 호위하던 두 병사가 시퍼런 칼을 두손에 모두어 잡고서 무릎을 꿇었다.
저승에서도 끝까지 왕을 보위하겠다는 '숭고한' 사명감탓인지 자신들의 배를 찌르는데 한치의 주저함을 보이지 않았다.
곧이어 고리자루 큰 칼(環頭大刀)이 그들의 목을 내리쳤다.
또다른 수십명은 피안의 세계에서 주인을 받들겠다는 절절한 믿음과 한편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감싸안은 채 극약을 마시거나 흉기에 맞아 하나 둘 쓰러졌다.
미리 자신의 운명을 감지한 일부 젊은이들은 사선을 넘어 이웃 나라로 도망치기도 했다.
그리고 2년여 뒤, 이들 대다수는 왕을 지키는 혼이 되어 거대한 무덤속으로 향했다.
대왕의 나라, 대가야 왕의 죽음. 그리고 이어진 비밀의 장(葬), 껴묻이. 이른바 순장(殉葬)이다.
경북 고령의 지산동 44호 고분. 가야 고분중 최고 위계를 자랑하는 이 비밀의 무덤속으로 들어갔다.
캄캄한 무덤속, 기나 긴 세월과 숱한 도굴에도 불구하고 왕과 측근들의 누운 자리는 여전히 그 흔적이 남아 있었다.
왕을 안치한 봉토 중앙에는 길이 9.4m의 주인돌방(主石室)이 견고하게 짜여져 있었고, 그 남쪽과 서쪽에는 왕의 부장품을 쌓아둔 돌방(副葬石室)이 각각 1기씩 있었다.
주인돌방을 덮은 돌은 모두 12개. 우륵 12곡, 1년 열두달을 연상케 했다.
주인돌방의 덮개돌을 걷어내자 발치쪽에 인골 흔적이 나타났고, 학자들은 왕의 머리맡과 발치에 시종 2명이 묻혔을 것으로 추정했다.
부장품 돌방에서 검출된 2인의 뼈는 창고지기로 보였다.
또 주인돌방 주위로는 32기의 작은 돌널(石槨)이 부채살과 원주모양으로 둘러져 배치돼 있었다.
왕의 무덤에 수십명이 껴묻힌 셈이다.
왕과 생사를 같이 했던 최소 36인의 영혼이 꿈틀거리는 듯했다.
1500년 전의 일을 되뇌이면서….
수수께기 하나, 과연 이들은 누구였을까.
이 32기의 돌널 가운데 18기에서 22인의 뼈가 나왔다.
6호널과 13호널에서는 20, 30대 남녀가 머리 방향을 반대로 한 채 반듯이 누워 있었다.
특히 13호널의 남녀 둘은 포개져 합장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곳에 숨겨진 비밀은 뭘까. 혹, 이들은 부부사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이 스쳐갔다.
21호널에는 7, 8세 여아 2명이, 28호널에는 30대 남자와 8세 여아가 함께 묻혀, 일부에서는 자매지간이나 부녀지간으로 보기도 했다.
그러나 여태 그 비밀의 문은 시원스레 열리지 않고 있다.
김세기 대구한의대(역사지리학) 교수는 "왕이 대국을 호령할 때, 곁에서 시중을 들고 호위를 하거나 왕의 병을 치료하고 음식을 마련하는 등 가까운 거리에서 왕을 모셨던 이들로 보인다"고 말했다.
전쟁과정에서 붙잡히거나 죄를 지어 노예가 된 이들도 묻혔을 것이라고 했다.
돌널 주변에서는 토기, 말 장구, 칼과 화살촉, 도끼, 금.유리 귀고리, 팔찌, 방추차 등 갖가지 유물이 쏟아졌다.
물고기뼈와 약재로 쓰이는 나무열매도 나왔다.
무기류를 가진 호위병, 말이나 마차를 다룬 기병, 방추차를 이용해 옷을 만든 사람, 장신구를 착용한 시종, 약재를 지닌 치료사, 물고기와 함께 묻힌 음식 조리사 등으로 그 구성원을 유추해 볼 수 있었다
또 닭뼈와 말 이빨까지 출토돼 가축이 함께 순장됐다는 것을 시사했다.
베일에 쌓인 수수께끼속에 또 하나의 짙은 의문거리가 생겼다.
대다수 돌널과 달리 12호널과 17호널에는 덮개돌과 측면 벽이 온전하게 보존돼 있는데도 부장품이나 인골의 흔적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껴묻이 돌널 11기가 주인돌방과 함께 발굴된 지산동 45호 고분에서도 이처럼 유품과 인골 흔적이 전혀없는 돌널 1기가 발견됐다.
지역 한 사학자는 "왕이 죽은 뒤 3년상을 치렀고 가매장에서 무덤 조성 뒤 본 매장까지는 2년 3, 4개월이 걸린 것으로 보인다"며 "이 기간중 죽음을 피해 도망간 이들이 나왔을 가능성도 있다"고 풀이했다.
사후세계를 믿었지만, 삶에 대한 질긴 애착은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으리라.
수수께끼 둘, 그렇다면 순장된 이들은 어떻게 죽었을까. 순순히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만 했을까. 아니면, 생존을 위한 강한 몸부림이 있었을까. 과연 어떻게 죽어갔을까.
지난 77년 지산동 고분군에서 발굴된 사람 뼈와 이빨을 감정했던 주강(73) 한국의학장학회 이사장(당시 경북대 의대 해부학교실 교수)은 "타살 흔적이 곳곳에서 나왔다"며 "두개골에 구멍이 뚫리거나 뼈 일부의 색깔이 바뀐 경우도 많았다"고 말했다.
주 이사장은 자결과 납 중독의 가능성도 제기했다.
8세 여아의 두개골에서는 둔기로 맞은 흔적이 있고, 상당수 인골에서는 독극물로 인한 변색이 나타났다는 것.
특히 무사의 것으로 보이는 일부 뼈는 두개골과 몸통이 외부요인에 의해 분리된 것으로 나타나 할복의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고구려 고국천왕이 죽었을 때 수많은 신하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함께 묻혔다는 '땔나무 언덕(시원;柴源)'을 연상케하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별다른 저항없이 수십명의 죽임을 가능케 한 요인은 무엇일까.
이같은 집단적 죽임의 밑바탕에는 사후세계에 대한 가야인들의 인식과 사상이 깔려 있었다.
삶의 세계가 죽음의 세계로 이어진다는 '계세(繼世) 사상'. 영혼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영혼불멸의 사상'.
'이 세상의 정치적 위계와 질서, 경제적 부는 다음 세상으로 이어진다'는 인식은 평소 자신이 사용하던 물품을 그대로 무덤으로 가져가고, 심지어 별도의 창고(부장품 돌널)까지 만들어 채웠던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현세에서 최고의 권력과 부를 지녔던 왕이나 지배층이 죽었을 때 현세에서 그를 위해 봉사했던 시종이나 노비는 사후에도 왕을 받드는 사명을 다하기 위해 껴묻힌 것이다.
지산동 44호 고분은 이렇게 거대한 껴묻이 돌널을 품에 안은 채 옛 도읍지에 우뚝 서 있었다.
대가야의 전성기였던 셈이다.
경북 성주 성산리 고분, 경남 합천 옥전고분과 반계제 고분, 함양 백천리 고분, 함안 도항리 고분, 부산 복천동 고분과 경남 김해 대성동의 상당수 고분에서도 이같은 껴묻이 흔적은 발견된다.
그러나 김해나 부산의 경우 별도의 껴묻이 돌널없이 부장품속에 1, 2인의 인골이 발견됐을 뿐 그 규모나 순장자 수는 지산동 고분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껴묻이를 통해 당시 왕(주인공)의 강력한 힘과 권위를 알 수 있었다.
땅을 파서 고르고, 돌벽을 쌓고, 수t의 덮개돌을 나르고, 봉분을 세우는 등 약 40명의 장례를 준비하는데 수백명의 인력과 수개월의 기간이 소요됐을 터.
더욱이 돌벽과 돌널을 정밀하게 축조하고 4~5m 높이의 봉토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쌓기 위해 전문 기술자도 대거 동원됐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또 알칼리 성분의 토질, 공기가 통하지 않도록 꼼꼼하게 쌓는 축조기술 등이 '슬픔'의 뼈를 천년 이상 남게 한 요인이 아닐까. 순장자의 영혼을 달래기 위한 주술사를 비롯해 무덤 축조 과정에서 단계별로 제사의례도 행한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이처럼 장기간에 걸쳐 수많은 인력을 동원한 것은 역시 강력한 왕권의 존재를 방증하고 있다.
대규모 껴묻이는 지배체제를 더 굳게 하는 하나의 수단으로도 작용했다.
껴묻이를 통해 '강력한 왕국', 대가야는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그리고 함께 묻힌 토기등잔의 작지만 오지게도 우람한 자태에서도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또한 그 언젠가 아물거리며 사그라졌을 등잔불이 지금 지산동 44호 고분에서는 다시 환하게 켜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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