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이후 한국과 일본은 한결같이 미국에게 안보를 의존하고 그 시장을 이용하여 경제성장을 해왔으므로,실질적으로 전통시대의 중국 자리에 미국이 앉아 사대교린(事大交隣)의 구도를 유지해온 셈이다.
그런데 최근 아시아 지역의 경제성장이 두드러지고 아세안, 동북아공동체, 남북한의 접근 등 지역 통합이 거론되면서 상대적으로 미국은 기득권 상실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특히 9·11테러 이후 미국은 거추장스러운 국제법이나 국제 도의를 벗어 던지고, 그 가는 길을 막아선 자들의 섬멸을 신이 내린 사명으로 여기는 스스로의 원형에 더욱 집착하고 있다.
명목이야 무엇이든 북한을 선제공격이라도 하겠다는 비현실적인 위협의 심리 배경은 단순하지 않다.
최근 원조식량을 실은 배가 밤중에 조용히 북한으로 떠났고, 그 후 개성공단 기공식, 남북철도 연결식도 쓸쓸하게 거행되었다.
비밀 대북송금 논의가 미국에서 처음 제기되었다는데, 당국의 미국 눈치 살피기는 이해할만하다.
한편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임을 자랑해온 일본은 버블이 터지면서 겪은 '잃어버린 10년'의 경제침체에 반비례하는 중국의 경제성장과 아시아에서의 소외감을 미국에 밀착함으로써 달래려 하고 있다.
부시는 노무현 대통령을 고작 몇 분 만난 뒤 등을 두드리며 이지(easy)한 사람이라고 말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고이즈미와는 어깨동무로 보란 듯이 우정을 과시했다.
이 모습은 미국이 조선을 일본에 넘겨준 가쓰라테프트조약(1905년)을 떠오르게 하는 장면이었다.
이에 맞선 북한은 옛 여인들의 은장도 대신 핵과 미사일을 품고 너죽고 나죽자는 논개식 사고로 한반도를 중심에 둔 카오스적 상황을 가중시키고 있다.
외교는 관련된 민족의 집합적 무의식(원형)과 지정학을 반영하는 것이므로, 그것이 변치 않는 한 비슷한 상황에서는 같은 구도가 되풀이된다.
조선과 일본은 서양의 충격에 한결같이 양이운동을 벌였으나 조선은 일절 타협이 없었고 끝내는 미국군함을 대동강에서 불태워 침몰시킨 한편 일본은 선선히 미국에 따랐을 뿐만 아니라 그 힘을 이용하여 조선을 식민지화시켰다.
"일본 전통무술과 같이 상대가 당기면 끌리고, 밀면 당기는 절묘한 수법을 구사하여 실리를 얻어내는 것"(하우스 호퍼)이 일본 외교의 특성이다.
일본은 노 대통령을 국빈대우 하는 대신, 6월 6일 현충일을 방일 날로 못 박았고 그날에 맞추어 재군비를 목적으로 하는 유사법제를 통과시켰다.
청일전쟁의 강화회담(시모노세키조약, 1895)에서 중국 대표 이홍장을 권총으로 위협하고 회의장 밖에서 대포를 쏘아대며 군사력을 과시했던 사건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또한 "창씨개명은 한국인의 바람으로 실시되었다"는 유력한 차기총리 후보 아사오 타로의 망언이 있었다.
이 발언은 65년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에서 "식민지통치가 한국인에게 도움을 주었다"(구보다의 망언)는 말과 같이 앞으로 있을 북한과의 전쟁배상금 교섭을 염두에 둔 것으로, 전후 일본의 피해국 배상정책의 기본 노선인 "되도록 늦게, 되도록 적게"를 실천하기 위한 수순일 것이다
한일 정상이 만난 화기애애해 보이는 만찬회에서 "미래지향"의 소리가 연발되었다.
그러나 일본측은 금년 8·15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다짐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현실적으로 미군 주둔은 동북아지역의 세력균형과 안보에 기여해 왔으며 그 역할은 한반도 통일의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일본과 중국과의 선린관계도 물론 중요하다.
한국은 조선시대이래 실속없는 명분만을 내세워 번번이 좌절을 겪었다.
이번 노 대통령의 순방외교에서 북한 문제에 관한 발언은 상대국에 따라 미묘하게 달랐다.
영합과 명분외교에는 실리가 없다.
서울에서 나비의 날갯짓이 몇일 후 뉴욕에 폭풍을 몰고 올 수도 있는데(나비효과),카오스적일수록 우리의 목표는 분명해야 한다.
확고한 의지와 사대교린이 아닌 '용대(用大)와 공생'의 지혜로 평화를 발신하며, 미국·일본·중국을 위시하여 전세계가 납득할 수 있는 철학과 정책이 명확히 제시되어야 한다.
그것은 곧 "비핵, 군비축소, 영세중립화를 통한 한반도 통일"이 될 것이다
김용운〈한양대 명예교수〉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대법원, 이재명 '선거법 위반' 사건 전원합의체 회부…노태악 회피신청
전광훈 "대선 출마하겠다"…서울 도심 곳곳은 '윤 어게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