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콜릿, 레이스제품, 맥주, 다이아몬드 가공 등 벨기에를 설명하는 말은 수없이 많다.
유럽연합(EU) 본부가 있는 국제도시 브뤼셀, 영국의 여류작가 위다(Ouida)가 쓴 소설 '플란더스의 개'로 유명한 세계적 항구도시 안트베르펜, 제2의 베네치아로 불리는 브리헤 등 벨기에라는 국가이름 못지않게 유명한 도시들도 있다.
그러나 한때 국가분열의 위기에 직면했던 사실은 별로 알져지지 않았다.
벨기에는 1831년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하면서 국제무대에 본격 등장했다.
독립 당시부터 첨예한 지역갈등의 소지를 안고 출발했다.
네덜란드의 영향권 아래 있으면서 언어도 네덜란드어를 썼던 북쪽의 플랑드르와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남쪽의 왈롱.
1천만명을 조금 넘는 인구 중 57%가 게르만계의 플레미시(플랑드르인), 42%는 라틴계의 왈로니안(왈롱인)이다.
양대 언어권 갈등은 1910년 표출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어를 쓰는 플레미시들이 동등한 언어교육, 문화행정을 요구하며 당시 가톨릭계통의 학교에 프랑스어와 함께 네덜란드어를 공식 교육언어로 채택한 것. 정치·경제적 우위에 있던 왈로니안들은 프랑스어의 주도권을 놓으려 않았고, 갈등은 점차 심화됐다.
2차 세계대전을 지나며 갈등은 첨예해졌다.
당시 국왕(벨기에는 입헌군주국)이던 레오폴드 3세는 내각과 상의도 없이 벨기에 군대를 독일에 투항토록 지시했고, 독일에 대해 격렬한 저항을 벌이던 왈론지역은 크게 반발했다.
1950년 국민투표를 통해 레오폴드 3세의 귀국이 결정됐으나 왈론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장남인 보두윈 국왕이 즉위하게 된다.
국민투표 결정을 왈롱이 무산시킴으로써 플랑드르의 단결을 더욱 강화하게 됐고, 격화된 지역대립은 정치권에 그대로 반영됐다.
1950년대에서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벨기에내 정당들은 언어권에 따라 분열됐다.
기독사회당은 1968년 플레미시 기독민주당과 왈로니안 기독사회당으로 양분됐고, 사회당과 자유당도 지역에 따라 나뉘었다.
정치권의 지역대립은 국가분열까지 몰고갈 태세였다.
그러나 벨기에인들은 현명했다.
더 이상의 지역다툼은 국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렸고, 1970년부터 지속적인 헌법 개정을 통해 마침내 1993년 연방제 국가로 거듭난다.
벨기에는 헌법 제1조에 "벨기에는 공동체(communities)와 자치지역(regions)으로 구성된 연방국가"라고 명시돼 있다.
국가의 경영권은 법적으로 동등한 각 자치지역에 배분됐다.
우리나라처럼 대권만 쥐면 모든 것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아예 없애버린 것이다.
연방의회의 상하 양원 의석수도 지역별 인구비례에 따라 일찌감치 정해버렸다.
플랑드르와 왈롱은 벨기에라는 국가 체제 아래 발전적인 경쟁을 하는 대상일 뿐 더 이상 타도하거나 한쪽으로 통합시켜야 하는 눈엣가시가 아닌 셈이다.
물론 여전히 정치·경제적 갈등은 남아있고, 아직 주민들 사이에 감정의 골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는 잠재적인 지역간 차이일 뿐 적대적으로 상대방을 해치려는 패권의식과는 거리가 멀다.
브뤼셀의 회사원인 브르노 데쇼베르씨는 "과거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들이 현재 벨기에선 평범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것이 지역간 결혼. 10년전쯤 출판된 국내의 벨기에 소개책자에는 "두 지역 사이엔 아예 혼인관계가 없을 만큼 갈등이 심각하다"고 적혀있다.
그러나 적어도 양대 언어권의 완충지대인 브뤼셀에선 "결혼하는데 뭐가 문제냐"며 오히려 반문할 정도다.
브뤼셀자유대학교에서 만난 코피테르 교수 부부는 "우리도 플랑드르와 왈롱 출신이지만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며 "벨기에의 지역갈등은 다분히 정치적인 딜레마일 뿐 주민 감정은 이미 희석됐다"고 말했다.
지난 6월7일은 벨기에 국민들에게 감격적인 날이었다.
세계 4대 그랜드슬램 테니스대회 중 하나인 프랑스오픈 여자단식 결승전에 벨기에의 두 소녀가 나란히 올랐기 때문. 시합이 시작될 무렵 35℃를 웃도는 폭염에도 불구, 브뤼셀 중심에 있는 그랑플라스(대광장)엔 시민들로 발디딜 틈이 없게 됐다.
이날 시합이 눈길을 끈 다른 이유는 결승 진출자 2명의 출신지가 다르기 때문. 쥐스틴 에넹(Justine Henin)은 프랑스어권인 왈롱 출신이고, 킴 클라이스터(Kim Clijsters)는 네덜란드어권인 플랑드르 출신. 벨기에인들에겐 지역대결인 셈이다.
경기가 시작되자 시민들은 열광했다.
브뤼셀은 두 언어의 공동사용지역이지만 프랑스어가 85% 정도로 절대 우위다.
때문에 취재팀은 에넹을 응원하는 목소리가 훨씬 클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일부 젊은이들은 장난스레 상대편 선수에게 야유를 보내기도 했지만 어느 쪽이 점수를 내던 환호성은 똑같았다.
오히려 수세에 몰리던 클라이스터가 선전할 때 관중들은 더 열호했다.
경기는 에넹의 승리로 끝났다.
응원나왔던 한 시민은 "플레미시냐, 왈로니안이냐가 중요치 않다.
오늘은 위대한 벨기에의 날이다"고 말했다.
다른 시민도 "언어가 다르다고 해서 상대를 차별하거나 힘으로 누르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며 "차이를 인정하고 상대방을 존중하는데서 벨기에인의 진정한 힘이 나온다"고 말했다.
취재팀=서종철·김태형·김수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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