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밖에서 배운다-우리지역 답사

우리나라의 모든 지명들은 어느 것 하나 무심히 지어진 게 없다.

지명에는 동네의 유래와 전설, 설화 등이 고스란히 스며있는 것. 여유가 있는 방학을 이용해 우리 동네의 유래나 문화재, 역사 유적지를 방문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내가 사는 지역에 대한 사랑이 절로 생길 뿐만 아니라 교과서 속 지식을 가장 쉽게 이해하는 계기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대구에서 가장 큰 동(洞)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대명동을 사례로 들어본다.

▲대명동

대명동(大明洞)이라는 이름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 귀화한 명나라 장수 두사충에서 비롯된다.

두사충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제독 이여송의 일급 참모로 전쟁에 참여했다.

조선군과 긴밀하게 전략 협의를 하는 중요한 장수로 활동과 공적이 상당했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그는 조선에 귀화했다

조선 조정은 그에게 대구의 현 경상감영공원 일대 땅을 내려 살도록 했다.

이후 경상감영이 그리로 옮겨오자 그는 땅을 모두 내놓고 지금의 계산동으로 옮겨 살았다.

내내 고향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을 그리워하던 그는 최정산(지금의 대덕산) 밑으로 집을 옮겨 단(대명단)을 쌓고 매월 초하루가 되면 고국을 향해 배례를 올렸다고 한다.

대명동이란 이름은 그때 붙여진 것이다.

▲지명과 이야기

대명동에 내려오는 지명의 유래나 전설, 설화 등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면 흥미로운 곳이 많다

옛 흔적은 대부분 사라져 찾기가 수월치 않지만 얽힌 이야기들은 흥미진진하다.

지금의 대구교대와 경상중, 남대구 우체국 일대에는 해발 85m 정도의 언덕이 남쪽을 향해 골짜기를 이루고 있었다.

약 200여년전 이 일대는 울창한 잡목림을 이뤄 여우, 늑대 등이 많이 살았고 최근까지 '긴등골'이라 불리렸다.

인근 마을 사람들은 어린 아이가 죽으면 여기저기에 묻었는데 여우들이 이 무덤을 파헤치려 몰려든다고 해서 '야시골'이라는 이름도 붙었다.

영선시장 일대에는 과거 영선못이 있었다.

시가지에서 가까운데다 물이 많고 경치가 좋아 농업용수는 물론 낚시와 수영 등 시민들의 휴식처로 사랑받았다.

그러나 농토에 집들이 들어서자 필요가 없어진 못은 메워졌고 거기에 시장과 주택이 들어섰다.

영선못은 조선 말엽 어느 고관이 한 도사의 충고를 들어 개인 재산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현 대명10동 일대는 도촌(都村)으로 불렸다.

부락 주민의 70%가 도(都씨) 성을 가져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지만 다른 이야기도 있다.

18세기 어느 때 갑작스런 홍수로 낙동강이 범람, 부산과 대구를 오가며 장사를 하던 상선들이 대피하던 중 일부가 대명천 부근으로 피했는데 낙동강 물이 줄어든 뒤에도 돛대가 걸려 빠져나가지 못했다는 것. 그래서 부근 마을을 도촌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다.

▲만촌동의 모명재

대명동의 지명 유래를 좇다 보면 만나는 것이 모명재다.

이야기에서 출발해 역사 유적으로 이어지는 제대로 된 체험학습을 하려면 현재의 만촌동에 있는 모명재를 찾아가 보는 것이 좋다.

두사충은 죽기 전에 자신의 묘터를 봐두러 지금의 만촌동 담티고개를 넘어가려 했으나 기력이 다해 되돌아오면서 현재의 남부정류장 뒤편 형제봉 기슭에 묘터를 잡도록 했다.

여기에는 두사충의 추모 사당인 모명재와 묘소, 그리고 두사충의 7대손인 두한필의 효행을 기려 나라에서 세운 명정각과 묘가 있다.

모명재는 1912년에 설립된 것으로 이후 1966년에 새로 지었으며 모명재 안에 이순신 장군의 7대손이 지어 보낸 비문을 별도로 새긴 신도비가 있다.

만촌동의 한켠에서 대명동의 유래를 생각하며 조선 중·후기 시대 상황을 상상해보는 것도 좋은 체험이 될 것이다.

김경호(체험교육 컨설턴트)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