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지역 감정 이렇게 풀자(4)-독일

서베를린에서 과거 베를린 장벽이 남아있던 흔적을 지나 5분 정도 더 차를 타고 가다보면 낡았지만 거대한 건물 한채가 눈에 들어온다. 옛 동베를린 구역에 남아있는 공산당사 건물. 과거 프로이센의 왕궁이었던 건물을 헐고 공산당이 새로지었다. 통일 후 독일정부는 이 건물을 다시 헐고 왕궁을 복원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구 동독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됐다.

폐허로 남아있는 공산당사는 통일된 지 만 1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동·서독 주민간의 갈등을 여실히 보여준다.

특히 부동산 소유권 문제는 아직도 엉킨 실타래를 풀지 못한 채 갈등만 증폭시키는 실정이다.

비록 공산치하였지만 동독 주민들에게 주택 소유권은 인정됐다.

공장이나 농지, 숲은 물론 당 소유였다.

통일 직후부터 주택 소유주를 정하는 문제가 말썽이 됐다.

아파트와 단독주택의 경우 성격이 조금 다르다.

아파트는 비싼 세금을 물고 소유권을 인정받아야 했기 때문에 대부분 임대형식으로 남았다.

결국 통일 전의 집 주인이 통일 후엔 세입자로 전락한 셈이다.

더 큰 문제는 단독주택이었다.

특히 동베를린 지역의 경우 나치가 집권하기 전까지 유태인 소유 주택이 많았다.

유태인이 쫓겨간 뒤 나치당원들이 집을 접수했고, 공산당이 집권하면서 구 동독인들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

통일이 되자 집을 빼앗겼던 유태인과 잠시나마 소유권을 갖고 있던 나치당원, 그리고 구 동독인 사이에 소유권 분쟁이 벌어졌다.

이같은 분쟁은 10년이 훨씬 지난 현재도 계속 진행 중이다.

심지어 이런 경우도 있었다.

구 동독에서 1949년 지어진 주택을 소유하던 한 주민이 1951년 서독으로 탈주했다.

이후 그 집은 다른 동독 주민이 소유해 약 40년간 살았다.

통일이 되자 서독으로 탈출했던 그 주민은 자신의 옛 집을 찾아가 "내 집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이러한 분쟁은 동독지역에서 비일비재하다.

구 동독내 최대 일간지는 노이에스 도이칠란트(Neues Deutschland)였다.

100만부가 훨씬 넘는 판매부수를 자랑했지만 통일 이후 8만부도 채 안되는 군소신문으로 전락했다.

당 기관지라는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서방 자본들이 인수를 꺼렸기 때문이다.

규모는 축소됐지만 이 신문은 자본주의의 때가 묻지 않은 '동독의 목소리'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동독 주민들은 여전히 '우리편'이라며 신문을 애독하고 있다.

이 신문의 페터 키르쉐이씨는 환갑이 멀지 않은 노년 기자다.

동독시절 해외 특파원까지 지낸 '잘 나가던' 기자였다.

키르쉐이씨는 "갈등의 원천은 동독인의 자존심이 뭉개졌다는데 있다"고 말했다.

분단 시절 그에게는 종종 선물을 들고 찾아오는 서독의 마음씨 좋은 집안 아저씨가 있었다.

분단 상황에서도 서독인들의 동독 친척 방문은 허용됐었다.

그러나 통일 직후 아저씨에 대한 환상은 깨졌다.

독일 정부는 통일 직후 한시적으로 동·서독 마르크화의 1대1 교환을 허용했었다.

뉴스가 알려진 직후 그 아저씨는 암시장에서 바꿔온 동독 마르크화를 잔뜩 들고 와서는 "너는 동독인이니까 서독 마르크화로 바꿀 수 있다.

이 돈을 바꾼 뒤 나눠갖자"고 제안했다.

키르쉐이씨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서독사람들은 돈이라면 불법도 서슴지 않는다는 것을 그 때 깨달았습니다.

비록 가난했지만 문화인임을 자부했던 동독인의 자존심을 서독사람들은 돈으로 묵살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차츰 변하고 있다.

독일인들은 "통일 독일에 대한 성급한 기대감이 잦은 시행착오를 낳았다.

지금은 서로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갈등을 해결해 나가고 있다"고 말한다.

여전히 서독인을 베시스(Wesis), 동독인을 오시스(Osis)라 부른다.

서쪽사람을 뜻하는 베시스에는 '그래 너 잘났다'는 비아냥이, 동쪽사람인 오시스에는 '게으르고 멍청하다'는 깔보는 인식이 담겨 있다.

하지만 굳이 주먹다짐까지 벌이며 싸움을 걸 생각이 아니라면 입 밖에 내지 않고, 목 안에만 담아두는 말이다.

통일이 미래를 보장하는 장밋빛 환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동독인들은 한 때 공산당의 후신격인 민주사회당(PDS)을 전폭적으로 지지했었다.

민사당은 지난 98년 총선에서 20%를 훨씬 웃도는 동독지역 평균 득표율 덕분에 중앙 정치무대에도 진출했다.

하지만 2002년 총선에선 전국 평균 4%의 저조한 지지율을 기록, 원내 진출에 필요한 전국 득표율 5%를 넘지 못해 정치무대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베를린자유대에서 만난 한 학생은 "민사당이 자신들의 욕구불만을 해소해 줄 것으로 기대했던 동독인들이 현실을 직시하게 됐다"며 "동독지역에 투입됐던 천문학적인 돈들이 차츰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으면서 갈등도 잦아들고 있다"고 말했다.

키르쉐이 기자는 "동독민의 이익을 대변할 지역정당이 출현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며 "지난 98년 총선에서 그나마 선전한 것도 구 동독시절 지명도가 높은 인물들이 대거 출마했기 때문인데 이젠 그만한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 없다"고 말했다.

과거 동독을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들이 성장하기 때문. 이들은 자신을 독일인으로만 여길 뿐 동독인이란 의식은 없다.

동독 출신에 대한 서독인들의 홀대도 예전에 비해 크게 줄었다.

동독인끼리 똘똘 뭉쳐서 괜시리 서독인들과의 지역감정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의식도 한몫하면서 양측의 반목도 서서히 잦아들고 있다.

취재팀=서종철·김태형·김수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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