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산, 가야산. 그 산을 타고 흘러내린 두 하천, 가천과 야천. 그리고 두 물줄기를 낙동강으로 끌고 간 회천이 적셔놓은 땅, 고령. 1천700여년 전, 대가야는 그 곳에 있었다.
가야산을 모태로, 회천을 젖줄로, 야로 철을 무기로 한 대가야. 그렇다면 대가야는 고령에만 머물렀을까. 힘이 넘치면 발산하는 법. 고령 세력은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밖으로 밖으로 뻗어 나갔다.
비옥한 땅은 생산물을 남겨 가진 자와 덜 가진 자 사이에 계급이 생겨나게 했고, 철제 무기는 피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피의 대가는 더 넓은 땅이었고, 지배계급은 그 땅을 지키기 위해 또 피를 불러야만 했다.
역사는 그런 것이었다.
300년대 전반, 변한 소국(반로국)에서 '가라국'으로 거듭난 대가야는 그렇게 피의 역사를 준비하며 서서히 기지개를 켰다.
내륙은 물론 수로를 통한 해상 교통로로 농.수산물, 철산물, 토기 등을 거래해 이득을 챙겼다.
지배계급은 권력 유지를 위해 덜 가진 자들을 동원해 산성을 쌓고 경작지를 넓혔다.
300년대 중반부터 지배층의 무덤도 기존 나무(木槨墓) 대신 돌널(石槨墓)을 이용하는 등 축조방식을 바꿨다.
철과 잉여 생산물을 기반한 힘은 결국 지배계급의 눈을 바깥으로, 더 넓은 땅으로 돌리게 했다.
이즈음, 한반도는 2강(고구려, 백제), 2약(신라, 가야) 구도였다.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구축한 고구려는 낙랑(313년), 대방군(314년) 등 중국 한군현 세력을 쫓아내고 백제와 국경을 접하게 됐다.
백제는 김제 벽골지 등 수리시설을 갖춰 농업생산력과 경제적 기반을 확대, 이를 토대로 국가체제를 정비한 뒤 정복사업에 나섰다.
상대적으로 힘이 약했던 신라는 고구려에, 가야는 백제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신라는 392년 고구려에 '실성(實聖)'을 인질로 보내는 등 밖으로 고구려와 손을 잡고, 안으로는 왕권 확립에 힘을 쏟았다.
고구려와 신라가 손을 잡자, 백제는 가야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왜와 우호관계를 맺으며 이에 대항했다.
백제는 369년 가라(고령), 남가라(김해), 안라(함안), 다라(합천), 비자발(창녕) 등 가야 7국을 평정, 친백제 세력으로 끌어들였다.
가야세력을 중간 거점으로 왜와의 교역로를 확보, 한반도에서 백제 중심의 세력권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같은 고구려.신라-백제.가야.왜 연합세력간 팽팽한 긴장은 400년 고구려 광개토왕의 '남정(南征)'에 의해 균형이 깨졌다.
백제와 왜가 연계해 자주 신라를 침범하자 신라의 요청을 받은 광개토왕이 5만 병력으로 임나가라(금관가야) 종발성까지 치고 내려갔다.
백제가 패하고 임나가라와 안라국도 큰 타격을 입었다.
300년대 가야제국의 맹주였던 금관가야는 이를 계기로 급속히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금관가야는 한반도 북부의 문물 교역지였던 낙랑, 대방군이 멸망함으로써 이미 남부의 중개교역 기능을 잃은데다 왜와의 교역도 백제에 주도권을 뺏긴 터였다.
금관가야의 대표격인 김해 대성동고분이 300년대 말까지 축조되다 400년대부터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것도 이를 반영하고 있다.
가야 세력의 재편이 불가피한 시점, 기지개를 켜며 때를 기다렸던 대가야가 마침내 포효했다.
헤게모니 장악의 두 기둥은 농업생산력과 야로 철산지였다.
광개토왕의 남정에서도 별 피해를 입지 않았던 대가야는 김해세력 대신 백제와 왜를 잇는 교역 중개역할을 맡으며 전면에 부상한 것이다.
고령 지산동 32~35호 무덤에선 장식용이 아니라 실전에 쓰인 큰 칼과 철판 갑옷, 투구, 철모 등이 나왔다.
32호에서는 금동관도 출토됐다.
400년대 전반 무력을 지닌 지배층이었다.
이들은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북쪽 성주세력과 동쪽 낙동강 건너 신라를 견제하면서 내륙 교통로 확보를 위해 서남쪽으로 뻗어나갔다.
경남 합천군 봉산면 송림리 합천댐. 고령에서 야천을 따라 합천으로 접어들면 길목에 묘산천이 닿아 있고, 이 하천은 다시 황강으로 이어져 상류쪽인 합천댐에 이른다.
이 댐 수몰지구의 반계제고분군에서 나온 토기는 400년대 전반까지는 소가야(경남 고성) 양식이지만 중.후반부터 대가야 양식 일색으로 바뀐다.
경남 거창군 말흘리 고분, 함양군 백천리고분, 의령군 유곡리 고분, 전북 남원시 월산리 고분, 장수군 삼고리 고분 등에서도 400년 중반 이후 대가야 토기가 주로 출토됐다.
대가야 세력이 서쪽으로 황강 상류인 합천 반계제 일대를 넘어 남강 상류인 거창, 함양을 거친 뒤 금강 상류인 남원, 장수까지 뻗어간 것이다.
남으로는 경남 의령까지 진출했다.
합천 쌍책면(옥전고분), 남원 아영면(월산리고분) 등지에는 대가야 양식뿐 아니라 토착계 유물도 나와 당시 대가야의 주도 아래 일정기간 소국의 독립성을 유지한 것으로 보였다.
이 무렵, 대가야는 여세를 몰아 중국에 사신을 보내 가야세력중 최고 지위를 인정받았다.
479년 중국 남제의 왕은 "가라왕 하지가 바다밖에서 방문하니 '보국장군본국왕'을 제수한다"고 했다.
대가야의 세력과 위상을 국제적으로 공인받은 셈이다.
또 고구려와 말갈이 481년 신라 미질부성 등을 침공하자 가야는 백제와 연합해 신라를 구했다.
이 때 가야는 맹주국 대가야를 중심으로 어느 정도 통합된 독자성을 띠었고, 국제관계에서 한 변수로 작용했다.
496년에는 신라 소지왕에게 꼬리가 다섯 자(1.5m가량) 되는 흰 꿩을 보내는 등 신라와도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
백제와 신라의 틈바구니에서 등거리 외교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이처럼 5세기 100년간 대가야는 세력권 확장과 왕국으로서의 위상을 드높이며 '맹주국 시대'를 활짝 열어 젖혔다.
김병구기자 kbg@imaeil.com김인탁(고령)기자 kit@imaeil.com안상호기자 shah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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