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송광사의 모래 솥

달에 대한 동양과 서양의 시각차는 크다.

한국, 중국, 일본 등 음력 문화권에서는 아주 긍정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

우리 세시에 매월 보름날은 명절 아닌 날이 없고, 여인의 나들이가 보장되지 않는 밤이 없다.

정월 대보름에는 달맞이 밤나들이, 2월 보름은 연등(燃燈) 밤나들이, 삼월 보름은 답청(踏靑) 밤나들이 등등. 우리 조상들은 여인의 다산력도 달의 정기로부터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보름달이 뜨면 여인들이 달의 정기를 마시게끔 밤나들이를 풍속으로 보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서양인들은 달에 대해 아주 어두운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달(Luna)에 어원을 둔 단어들은 하나같이 '미치광이'나 '광기'를 뜻한다.

이런 부정적 영향을 밝히려고 다수의 연구가 이루어졌으나 그 결론은 미신 이상의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살인사건, 자살, 대형 재난, 늑대인간증, 몽유병, 간질 발작 등과 관련한 100건 이상의 연구에서 달과의 의미 있는 상관관계를 찾아내지 못했다.

학자들은 전설, 전통, 그릇된 개념 등이 달에 대해 나쁜 인식을 심어준 것으로 결론지었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의 몇몇 발언들이 우리 사회를 험악하게 만들고 있다.

공무원 특강과 장·차관급 공직자 및 청와대 참모진이 참석한 국정토론회 자리에서의 발언들 때문이다.

여기서 행해진 대통령 언급은 시정의 우락부락한 대화를 연상케 한다.

"언론이 짓밟고… 조지고…". "공무원을 개××…". 품위 없고 야릇한 발언에 대해 언론의 혀 차는 소리가 나온 것은 물어 보나 마나다.

언론이 손가락만 쳐다보는 이유

문희상 대통령 비서실장은"보라는 달은 안 보고 가리키는 손가락만 본다"며 대통령을 나무란 언론을 원망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뜻으로 달을 가리키더라도 손가락질이 나쁘면 손가락을 보는 게 인지상정이다.

대학 총장이나 초중고 교장이라도 사퇴압력을 받을만한 언사를 해놓고, 좋은 뜻으로 해석해달라는 것은 염치를 잃은 요구다.

'대통령 말씀'은 하나의 흠도 남기지 않아야 하는 국민대표발언이다.

수많은 보좌진과 비서를 데리고 쓰라고 할 때는 그런 조건이 걸려있다.

대통령을 함부로 비판한다고 욕할 것이 아니라, 대통령이 존중될 수 있도록 처신을 경계시켜야 한다.

나라의 어른으로, 나라의 상징으로 표를 몰아준 국민들의 심정이 어떠할 지를 먼저 헤아려야 할 것이다.

대통령의 험한 언사는 귀를 막으면 넘어갈 일과성 국가품위 실추사건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대통령의 뒤틀린 국정 시각이다.

대통령은 지난 1차 국정토론회에서 정부의 국정주도력 상실을 걱정했고, 2차 토론회에서는 언론의 횡포(?)를 비난하며 '적대 언론과의 전쟁'을 선언했다.

비약이 있을지 모르나 국정 주도력 상실이 언론의 헐뜯기와 여론 왜곡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시각을 노출시켰다.

그러나 대통령이 말하는 언론의 횡포는 아무리 선의로 해석해도 '개인적 피해의식' 이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언론을 좋아하는 권력자가 없다는 것은 상식화된 사실이다.

견제와 균형이라는 민주 질서가 대통령으로 하여금 언론을 귀찮게 만드는 것이다

대통령의 전쟁선언에 따라 정부가 여러 후속대책을 추진 중이다.

참으로 딱한 노릇이다.

대통령이나 언론이나 그 주인은 국민 대중이다.

누가 국민들에게 더 잘 봉사하느냐를 다투는 관계다.

이런 특수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미국 헌법은 신문 언론의 자유를 제약하는 어떤 법률도 허용치 않고 있다.

정부가 자의적인 기준으로 신문 언론을 바꾸려 드는 것은 경쟁자의 발을 묶겠다는 발상이나 마찬가지다.

이번 언론과의 전쟁선언이 대통령 특유의 '적을 상정하는 의도적 갈등구조 만들기'였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대통령은 이제 창업자가 아니라 수성자다.

386을 앞세워 창업을 하기는 쉬워도, 2080을 한데 아우르고 국민들의 생활을 챙기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문제다.

386식의 반짝 아이디어나 말재주, 좌충우돌하는 전략으로는 결코 국민들을 내편으로 만들 수 없다.

국민들을 끌어들이지 못하면 언론과는 영원한 적이 될 뿐이다.

그것이 언론이 존재하는 이유다.

모래 솥에 불때기, 언론과의 전쟁

대통령은 5년 내내 언론과 소모적 전쟁을 벌인 지도자로 기억되게 해서는 안된다.

달 그림자에 칼부림하는 혼자만의 싸움을 그쳐야 한다.

대통령이 진정으로 걱정해야 할 일은 따로 있다.

실업에 좌절하고 있는 청년들, 노사혼란으로 설자리를 잃은 기업들, 생활고에 허덕이다 간 무수한 자살원혼들. 이들을 달래는 것이 대통령의 할 일이다.

언론과의 전쟁 대신 일자리, 노사안정, 국가경쟁력, 철통안보 이런 말들이 하루 24시의 화두가 돼야 한다.

고려 중엽의 큰스님이었던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은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종교분쟁 해결에 노력한 분이다.

지눌은"부처님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선이요, 말씀을 전하는 것이 교이기 때문에 선과 교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사이"라며 종파 싸움의 무의미성을 설파했다.

선과 교는 이 시대의 정부와 언론이요, 진보와 보수며, 신세대와 구세대다.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지눌의 지혜다.

순천 송광사에서 쓴 지눌의 수심결(修心訣) 곧 '마음 다스리는 비결'은 명문장으로서 뿐 아니라 그 의미심장함이 오늘을 꿰뚫고도 남는다.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접하는 것은 너나 없이 괴로워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사람들은 그런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영원한 진리를 알고 싶어한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오리무중이다.

그것이 중생들의 답답증이다.

…솥에 모래를 넣고 불을 땐다면 천만년을 지나도 밥이 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의 진리를 찾는 투가 이 모양이다.

진리를 찾을 데 가서 찾아야지, 없는 곳에 가 찾으니 찾아질 리 없다.

…"

박진용〈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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