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여름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가운데 노란 비옷을 입은 20여명이 800리를 걸어 소록도를 찾아가는 긴 여정의 첫 발을 대구에서 내디뎠다.
창녕, 진주, 순천, 벌교를 지나 소록도(전남 고흥)까지 향하는 행렬의 주인공들은 대구의 봉사단체 '참길회' 회원들. 그리고 장장 316km에 이르는 그 길은 일제 때 소록도 강제 수용이 시작되면서 한센병 환자들이 목숨을 바쳐 걸었던 눈물의 길이었다.
"일제 때 강제수용된 한센병 환자들이 피눈물을 쏟으며 걸었던 이 길을 따라 걸음으로써 그 분들이 느낀 고통을 조금이나마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
소록도까지 10일만에 그 길을 걷기로 한 이 행사는 매년 국립소록병원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해 온 참길회가 그 봉사 20주년을 기념해 마련한 것이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은 이제 매끈한 아스팔트에 덮여 있지만, 그 길 위의 봉사회원들에게 한여름 뙤약볕과 장맛비는 여전히 시련이었다.
1981년 설립된 참길회(대표 정학) 회원들은 지난 20년 동안 매년 여름(8월)과 겨울(1월) 100~300여명으로 '참길 소록 봉사단'을 꾸려 3박4일간씩 소록도에서 봉사해 왔다고 했다.
쓰러진 축대 보수, 도배, 이삿짐 옮기기, 페인트칠, 이미용, 제초작업, 안경 제작, 연극·풍물·노래 공연…. 마을 곳곳에 '할아버지 할머니 사랑합니다'라는 플래카드를 거는 것을 신호로 시작되는 봉사는 노력봉사에서 기술봉사, 문화봉사까지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고, 여름이면 보양축제, 겨울에는 과메기축제를 벌였다.
팥빙수, 뻥튀기, 붕어빵도 만들어 드렸다.
지금 소록도는 일부 해변이 관광지로 각광받을 정도로 대폭 개방돼 있지만, 20여년 전만 해도 병원 직원지대와 환자지대의 왕래조차 철저히 제한되는 수용소지대. 환자들은 지켜봐 주는 피붙이 하나 없이 한많은 생을 마감해야 했고, 육지 가족들의 거부로 유해조차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그때의 잔인한 상처들은 남은 이들의 가슴에 여전히 깊이 새겨져 있다고 했다.
이런 장벽을 뚫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그곳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마음을 열어 함께 하는 것. 뭍에서 멀어지고 가족들로부터조차 잊혀진 한센병 환자들의 사람에 대한 그리움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일을 참길회가 해 낸 것이다.
"참길(회)에서 왔다고 하면 어르신들이 없던 일거리까지 이것저것 만들어 시킵니다.
그만큼 저희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 놓으신 거지요". 참길회 운영위원 서미순씨는 20년 봉사의 결실은 서로간의 깊은 신뢰라고 했다.
대부분 70대 고령인 현지인들은 먼 곳에서 찾아 온 봉사자들을 손자·손녀처럼 반긴다고 했다.
손을 잡아보는 것만으로도 감동하고, '환자'인 자신들이 주는 음식을 꺼리잖고 선뜻 받아먹어 줘 고맙고, 가누기 힘든 몸을 구석구석 목욕시켜 줄 때면 어쩔줄 몰라하는 한센병 노인들.
마을 강당에서 자도록 돼 있는 봉사자들이 규정을 어기고 가끔 집으로 찾아 들면 새 이불을 꺼내 덮어주며 밤새 얘기 보따리를 되묶지 않는다.
15년 전 가뭄이 심했던 해엔 아껴아껴 모아 뒀던 물을 쓰라고 봉사자들 앞에 내 놓아, 물 300t을 준비해 갔던 봉사자들을 감동시킨 일도 있었다고 했다.
전국에서 소록도를 찾는 대부분의 봉사단체들이 마을을 1개밖에 방문할 수 없지만 참길회엔 10개 마을 전체가 개방돼 있기도 하다.
참길회는 소록도 봉사 20주년을 맞아 그동안 봉사자들이 기록해 놓은 '소록일기'를 모아 '이 땅에서 하늘까지'란 제목의 책으로 엮었다.
그리고 소록도 사람들을 위해서도 깜짝 선물을 준비 중이다.
그곳 740명의 할아버지·할머니들께 금목걸이 한 개씩을 해 드리기로 한 것. 이를 위해 회원들은 집에 있는 돌반지나 승진기념 반지 등을 모았고 상으로 받은 기념메달을 선뜻 내 놓은 이도 있었다.
참길회 문양식 집행위원장은 "소록도 봉사는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많은 것을 함축적으로 느끼고 배울 수 있는 기회"라며 "'소록이 있기에 참길이 있다'는 참길회 슬로건을 앞으로도 지켜 나갈 것"이라고 했다.
올 여름 참길 소록 봉사단은 도보 행군팀과 합류, 9일까지 봉사를 계속하고 있다.
최병고기자 cb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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