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깨끗함과 더러움

요즈음 하루를 보내는 것이 매우 어렵다.

귓가에 들려오는 세상의 소리는 그리 밝지만은 않다.

재벌회장의 죽음을 두고 대북 송금에 대한 특검의 탓이다, 비자금 탓이다 하며 서로의 탓이라고 한다.

청와대 부속실장의 향응사건이 조그만 청주 시내를 뒤숭숭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조용히 들여다보면 작금의 정치나 경제를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서로의 목소리만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는 듯하다.

즉 나는 깨끗한데 다른 사람이 더럽다고 한다.

정말 그럴까?

깨끗함과 더러움을 어떻게 정의 할 수 있을까?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판단할 수 있을까? 참으로 모호하다.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만 결국 자기 자신의 양심이며 절대자요 무한자인 신 앞에 서 있는 자기자신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어떤 분이 더러운 것을 "제 자리 있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참으로 멋있는 정의다.

우리가 맛난 음식을 먹고 영양분을 섭취하고 난 찌꺼기(똥)가 몸 안에 있을 때는 제자리에 있기에 더럽지 않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는 사람끼리, 또한 오랜만에 만나는 정다운 사람들끼리, 만나면 스스럼없이 서로 껴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제자리에 있지 않고 몸밖으로 나오면 제자리에 있지 않기에 더럽다.

돈도 자신의 자리에서 노동을 하고 번 돈은 제자리에서 번 돈이기에 깨끗하다.

그 깨끗한 돈으로 부모님에게 용돈도 드리고 친구들과 밥값을 계산 할 때 떳떳하다.

그러나 제자리에서 벌지 않고 뇌물로 생긴 돈은 더러운 돈이다.

결국 감옥으로 간다.

우리가 먹는 음식도 그릇 안에 있어야 한다.

바로 그곳이 음식의 제자리이다.

그러나 같은 음식이라도 길바닥에 있으면 더러운 것이 된다.

잡초라도 들판에 있으면 제자리 있으니까 보기도 좋다.

그 잡초가 무성한 들판을 거닐며 사색 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잡초가 곡식의 틈에 있으면 여지없이 뽑힌다.

우리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자리에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한다.

자신이 설자리 앉을 자리를 구분하지 못하면 분수를 모르는 사람, 더러운 사람이 된다.

그런데 왜 제자리를 찾지 못할까? 마음의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명예욕과 물질욕에 사로잡혀 세상을 아름답게 살아가는 길을 찾게 해주는 마음의 눈을 떠야한다.

그 마음의 눈으로 먼저 자기자신이 어떤 자리에 서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있을 제자리에 있을 때에 그 세상은 더러움이 사라지고 깨끗함이 넘치는 아름다운 세상이 된다.

이장환 칠곡 영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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