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론-8·15와 6자회담

아이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덩치 큰 아이에게 얻어맞은 작은 꼬마는 징징 울면서도 "다음에 보자"는 말을 던진다.

"언제 보자는 거냐"고 큰 녀석이 비웃자 "네가 늙었을 때"라며 굽히지 않는다.

이런 경우 일본 아이 같으면 진 아이는 "졌다"고 엎드려 굴복하는 것으로 상황을 끝낸다.

민족어와 민족성은 해당 민족이 생명체로서 생존을 위해 오랜 세월 다듬어온 지혜가 담겨 있다.

한국어의 '힘이 달리면서도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마음'이란 뜻의 '오기'와 일본어의 '깨끗이 졌다'는 뜻의 '앗싸리 마잇다'는 서로의 말로 번역하기 어려운 반대의 뜻을 지니는데, 저마다의 민족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일본 열도는 천년의 세월동안 300개 가까운 영토로 분할되어 무가정치체제를 유지했다.

칼에 의한 승부는 결과가 분명하므로 일단 대세가 기울면 '앗싸리 마잇다'로 사태를 수습하고는, 자기 잘못은 잊어버린 채 그 후의 최대 이익을 계산한다.

그 대표적 예가 제2차 대전에서 무조건 항복으로 '마잇다'를 선언하면서도 뒤로는 외교술을 발휘하여 최고 전범인 천황을 살리고 그 제도하에 경제대국화를 이룬 것이다.

한편 한민족은 그만큼의 세월을 과거시험과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하면서 글(文)의 논리를 앞세워 살아왔다.

정통성을 고수하며, 힘에 의한 압력과 좌절을 오기 하나로 버텨왔다.

지난번 김정일은 평양에서 열린 일본 수상 고이즈미와의 회담에서 납치 일본인 문제를 인정하고 사과하며 5명의 일본인을 돌려보냈다.

외교 사상 유례없는 너무나 순진한 태도는 일본인조차도 놀랐고, 고백외교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북한은 일본이 한반도에 행한 36년간의 흉악한 범죄역사가 있고, 또한 일본인의 '앗싸리 마잇다' 식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 그 솔직함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다.

맥아더는 일본을 "강자에게는 비굴하고 약자에게는 오만하다"고 평한 바 있는데, 김정일과 그 주변에는 일본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본래의 북한 주체주의 입장은 아직까지 일본과는 국교관계가 체결되어 있지 않으며 형식적으로 일제시대 이래의 독립전쟁을 계속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제대로의 논리라면 일본천황이 김정일에게 36년간의 범죄행위에 대해서 먼저 사과해야 할 것인데, 일본수상에게 선뜻 고백과 사과라니!

일본정부는 해방이 된 지 근 60년이 되는 오늘날까지도 강제로 끌고 간 수십만 노동자나 위안부 문제를 사과는커녕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천황이 "과거의 불행한 일에 대해서 심히 애석하게 생각한다"고 말한 것이 고작이었고, 관리들은 '잘 조사해보겠다', '증거서류가 없다'는 등 얼버무려 왔다.

또한 남한에게만 최소한의 돈을 던져주고는 어떠한 도의적 책임도 지려고 하지 않는다.

특히 위안부로 끌려갔던 할머니들은 지금도 일본대사관 앞에서 데모를 벌이며 그 죄의 정식 인정을 요구하고 있다.

북한에 대한 36년간의 식민지화와 관련된 일본의 배상은 미해결 상태이다.

또한 그 명목도 독립축하금, 협력기금, 원조금 등으로 교묘하게 바꿔감으로써 본래의 의미와는 다르게, 오히려 선심 쓰는 듯한 태도이다.

김정일의 납치고백은 일본에게 과거의 면죄부 이상으로, 피해국과 가해국의 위치를 뒤바뀌게 하고 말았다.

국익을 위해서는 일치하여 정부를 지지하는 일본의 언론매체는 매일처럼 북한을 악마의 나라로 몰아붙이며 국민감정을 부추기고, 일부 정치인은 또다시 식민지통치가 옳았다고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

더욱이 일본은 북·일 외교정상화를 거치지 않고 다자회담에 임하게 됨으로써, 대북한 외교에서 유리한 위치에 서고, 한편 북한은 일본이 던져 주는 것을 그저 받아먹어야 하는 꼴이 되었다.

분명 북한은 6·25 남침과 그후에 저지른 숱한 만행에 책임이 있다.

그러나 일본이 지금 행하고 있는 지나친 대북 논조는 한민족 모두에 대한 모멸로 확장되고 있다.

자신의 잘못은 쉽게 엎어버리는 일본의 '앗싸리'에 맞서 한국인의 피해의식이 뒷받침 된 오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지루하고 답답한 6자회담을 예감하면서 또다시 8·15를 맞았다.

한·미·일의 공동보조가 강조되고는 있으나, 일본의 얄팍한 술책으로는 결코 한국인의 마음을 열지는 못할 것이다.

김용운(한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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