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수도 베른에서 서쪽으로 40분 가량 차를 타고 가면 프랑스와의 국경에 가까운 인구 5만명의 소도시 빌(Biel)이 나타난다.
스위스는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로망슈어 등 4개 공용어를 쓰는데 이곳에선 프랑스어가 주언어다.
독일어권인 취리히에선 프랑스어를 듣기 힘들고, 프랑스어권인 제네바나 로잔에선 독일어를 만나기 쉽지 않지만 이곳 빌에서는 독일어와 프랑스어 간판이 나란히 거리에 걸려있다.
스위스의 26개 칸톤(canton)은 서로 다른 법체제를 갖춘 독립국가나 다름없다.
스위스는 칸톤이란 이름의 국가들을 한데 뭉쳐놓은 연방제 국가다.
칸톤들의 색채가 워낙 강하고 독특하다보니 중앙정부란 이름 아래 이들을 통제하는 일은 없다.
때문에 공용어로 4개 언어를 정해놨지만 쓰고 안쓰고는 칸톤들이 정하기 나름이다.
베른 칸톤의 경우 수도 베른시가 속해있기 때문에 그나마 다언어가 통용되는 지역이다.
그러나 한 칸톤내에서 다언어, 즉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함께 쓰다보니 언어권간 충돌이 가장 극심한 지역이 바로 베른이다.
1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스위스인들의 뇌리엔 지난 1993년 빌에서 발생했던 폭탄 테러의 아픈 기억이 생생히 남아있다.
프랑스어를 쓰는 베른주 서쪽지역, 이른바 '베르너쥐라'지역 주민 누군가가 학교에 폭탄을 설치해 한 명이 숨졌던 것이다.
범인은 잡히지 않았지만 원인은 분명했다.
독일어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베른 칸톤에서 프랑스어를 쓰는 베르너쥐라의 독립을 얻기 위한 것. 쥐라(Jura)는 스위스 서쪽에 놓인 프랑스와의 국경이 되는 산맥 이름이자 갈등의 상징이다.
독일어권과 프랑스어권의 갈등은 스위스 전역에 걸친 문제다.
다만 프랑스쪽 성향이 강한 베르너쥐라쪽에서 테러라는 극한 양상으로 불거졌을 뿐이다.
전체 언어권의 20%를 차지하는 프랑스어권 주민들은 70%를 차지하는 독일어권에 대해 일종의 피해의식을 갖고 있다.
정치, 경제적인 갈등도 내재돼 있지만 언어 자체가 갖는 문제도 상당한 원인이다.
스위스내 프랑스어는 본토 프랑스어와 거의 차이가 없다.
그러나 스위스 독일어는 다르다.
'호흐 도이치'라 불리는 본토 독일어와 스위스 독일어는 서로 의사소통이 안될 정도로 차이가 크다.
독일 베를린에서 십여년간 살다가 스위스로 이주한 한 한국인은 "이웃 주민들과 대화가 안 돼 애를 먹었다"며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살 때도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 토박이가 제주도 토박이를 만난 셈이다.
때문에 프랑스어권 주민들은 학교 교육에서도 호흐 도이치와 스위스 독일어 둘 다 배워야 하는 부담이 있다.
이같은 부담은 피해의식으로 나타났고, 결국 극단적인 갈등을 빚었다.
그러나 10년 전까지 종종 일어나던 방화와 테러는 이제 사라졌다.
테러로 인명피해까지 발생했지만 보복성 테러는 없었다.
"피는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공감대가 주민들 사이에 형성됐기 때문. 베르너쥐라의 자치권 문제가 공론화됐고, 현재도 칸톤 정부와 주민들 사이에 협의가 진행 중이다.
이 문제는 내년 주민투표로 결정된다.
이처럼 아픈 역사를 지녔음에도 주민들은 지역갈등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린다.
취재팀이 언어권간의 갈등을 질문하자 "상대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해결되는 문제인데 웬 호들갑"이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사실 유럽내 다른 국가들에 비해 스위스내 갈등은 지역갈등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만큼 미미하다.
엄연히 존재하는 갈등을 내부적으로 녹여내는 스위스인들의 저력은 바로 오랜 역사 속에서 체득한 노련함이다.
유럽 강대국인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틈바구니에 놓인 스위스는 이들 나라가 남으로 또는 북으로 진출하는 길목이었다.
끊임없이 외세의 침략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알프스 산맥 곳곳에 자리잡고 있던 촌락 국가들은 연맹체를 형성했다.
이것이 스위스 연방의 시초다.
언어와 종교가 서로 달랐지만 외세를 물리치기 위해선 서로 힘을 합쳐야 했다.
이런 와중에 힘이 센 촌락 국가가 다른 국가를 흡수 통일하는 것은 오히려 갈등만 야기함을 깨달았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전통이 싹튼 것이다.
스위스는 독특한 형태의 연방국가다.
미국이나 독일과도 전혀 다르다.
물론 스위스에도 연방정부, 연방법이 있다.
하지만 연방의회는 주요 정당들이 비례대표제로 의석을 나눠 갖고, 연방정부 임무는 외교·국방·우편통신·금융시스템·세관에만 한정돼 있다.
7개 부처 장관이 연방행정을 맡고 있고, 대통령은 장관들이 돌아가면서 일년씩 맡는 윤번제다.
특정 정당이 정권을 장악하는 일도 없고, 대권을 잡았다고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체제도 아니다.
정치는 정치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다.
회사원인 조셉 나빌씨는 "얼핏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국민투표제가 스위스를 지탱하는 근간"이라며 "유럽연합(EU) 가입을 두고 수차례 국민투표를 하는 것도 연방의회가 제멋대로 권력을 휘두를 수 없도록 견제하는 단적인 사례"라고 말했다.
스위스에선 어떤 칸톤이든 이익단체든 시민 10만명의 서명만 있으면 연방의회에 직접 의제를 내고 국민투표를 요청할 수 있다.
심지어 헌법 개정요구도 가능하다.
연방정부가 내놓은 새로운 법안에 불만이 있다면 5만명의 서명을 받아 반대 국민투표를 요청해도 된다.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스위스는 지역 이기주의가 팽배해야 유지되는 사회다.
이익단체이건 칸톤이건 강한 제목소리를 내고, 또 다른 단체들도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전통이 세계 제1위의 부국 스위스를 만든 원동력이다.
제네바에서 만난 한 주민은 "획일은 갈등을 덮는 포장지에 불과하다"며 "상대방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려는 자세는 당장 손해인 듯 보이지만 결국엔 함께 생존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서종철·김태형·김수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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