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망대-어느날 갑자기 흥부가 죽는다면?

제비다리 고쳐주고 갑부가 된 연흥부가 자식 10명과 아내를 남겨 두고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현행법상 다음 호주는 누가 될 것인가? 당연히 흥부의 아내? 아니다.

그동안 호주제에 대한 홍보가 많이 되었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흥부 아내가 호주를 승계 받을 것으로 생각들 한다.

하지만 흥부 아내가 호주가 되려면 아들도, 손자도, 딸도 없어야 된다.

현재 우리 민법의 호주승계 순위가 아들, 손자, 딸, 아내, 어머니, 며느리의 순(順)이기 때문이다.

필자도 직장을 얻을 때 비슷한 경험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몇 년 지나지 않았을 때라 이력서 호주 란에 당연히 어머니의 성함을 기입하였다가 담당자로부터 그것도 모르냐는 질책(?)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후문을 듣자하니 본적지에 신원조회를 의뢰하는데 호주 이름이 잘못되다 보니 번거로웠던 모양이다.

며칠 전 호주제 폐지를 위한 민법개정안이 법무부에서 마련되어 올 9월 국회에 상정될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별 무리 없이 통과된다면 오는 2006년부터는 호주제가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놀랍게도 호주제가 잔존하는 곳은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정말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동안 호주제로 인한 폐해는 생각보다도 매우 심각했다.

남성위주로 편제되는 호주제가 아들만이 대를 잇는다는 전통 남아선호사상과 교묘하게 결합되어 1년에만도 3만건 이상의 여아 낙태가 자행되어왔다.

한살짜리 손자가 실질적 가장인 어머니와 할머니를 제치고 그 집안의 대표가 되는 불합리함, 평생 자식을 길러왔으면서도 이혼했다는 이유만으로 동거인이 될 수밖에 없는 억울함, 아이를 낳는 것에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았던 남자가 자기 자식임을 알아차린 순간 간단히, 일방적으로 자신의 호적에 입적시키고 친권을 행사함으로써 겪어야 하는 미혼모들의 슬픔은 굳이 말해 무엇하랴.

혹자는 말한다.

왜 수많은 정상적인 가정들은 놔두고 예외적인 사례들만을 거론하느냐고. 그런 경우라면 얼마든지 현행법 안에서 조금 손보고 예외조항을 두어서 해결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물론 길은 없지 않다.

여성이 일가창립하여 자녀를 자신의 호적에 올릴 수도 있고, 전 남편과 합의만 되면 양부의 성을 물려줄 수도 있다.

그러나 반문한다.

왜 남성들에겐 가만히 놔둬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일을 여성들은 애써서 찾지 않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인지….

호주제는 단순한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인권의 문제이다.

조상을 숭배하고 전통과 가풍을 중시하는 우리네 문화는 소중하다.

문제는 왜 유독 그 혈통이 부계 쪽이어야만 하는 것인가이다.

성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시대의 사람들은 남자의 정자 속에 완벽한 기관을 갖춘 조그만 사람이 들어 있다고 여겼다.

여자는 단지 정자에게 영양 공급의 역할만 담당할 뿐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이 변했다.

지금 존재하는 '나'는 부모가 절반씩 보내준 유전자로 구성된다는 것은 유치원 어린이도 배우는 이치다.

호주제가 폐지되면 가족이 붕괴되지나 않을까 우려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물론 호주제가 폐지되면 호주를 중심으로 한 형식상의 가(家)제도는 사라진다.

그러나 대신 가족 구성원 전체가 평등하고 개인의 인권이 존중되는 새로운 가족제도가 생겨나게 된다.

호주제가 폐지된다고 해서 가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회가 낙인찍는 '정상가족', '비정상 가족' 여부가 드러나지 않으므로 다양한 가족에 대한 편견을 없앨 수 있고, 개인의 사생활이 보호됨으로써 인권적인 측면에서 진일보한 제도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호주제 폐지 개정안의 전망은 여성계의 부푼 기대와는 달리 밝기만 한 것은 아니다.

보수적인 유림과 일부 남성들이 거세게 반대하고 있으며, 상정되기도 전에 내년 총선을 앞두고 통과가 불투명하다는 소리부터 들려온다.

몇몇 국회의원들은 벌써부터 몸사리기에 들어가 호주제 폐지법안에 대한 의견을 묻는 질문에 "조금 더 있다가…"만을 연발하는 장면이 TV의 아침프로그램에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호주제 폐지가 곧 가족해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들도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행복한 가정을 원하지 결코 가족해체를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호주제 철폐로 양성평등이 한 걸음 앞당겨지면, 남성들도 그동안 가족에 대해 일방적으로 강요되어온 숱한 의무와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원론으로 돌아가 호주제 폐지가 옳으냐 그르냐를 왈가왈부하는데 에너지를 소모하기보다는 호주제 폐지 이후의 바람직한 대안 모색에 힘을 모을 때이다.

어렵게 마련한 개정안이 정치적 논리에 의해 누더기가 되거나 햇볕조차 보지 못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국회의 소신 있는 결정을 기대해본다.

정일선(경북여성정책개발원 연구원)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