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생산지나 무기를 소유한 자와 여기에 굴복한 자, 토기와 소금 등으로 교역권을 장악한 집단과 그렇지 못한 집단, 땅과 농기구를 가진 세력과 그 밑에서 농사를 짓는 계층. 가야제국은 이렇게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에 따라 힘의 우열이 갈렸고, 소국 안에서도 생산수단과 잉여 생산물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에 계급이 생겨났다.
피와 정복의 역사는 이런 체제를 더욱 굳혔다.
자본과 정보력이 세계와 국가, 그리고 인간을 지배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와 다를 바 없었다.
철과 땅, 토기는 오늘날 자본과 정보력, 핵무기에 견줄만한 힘이었고, 이의 배타적 소유는 벌써부터 계급 갈등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다.
1700여년전, 대가야인들의 삶의 모습은 그렇게 다를 수밖에 없었다.
왕이나 귀족들이 기와와 벽돌로 쌓은 튼튼한 집에서 살 때, 피지배층은 땅을 파고 그 위를 거적 따위로 덮은 움집에서 추위나 비바람을 견뎌야 했다.
한쪽에서 나무 열매나 밭작물로 끼니를 때울 때 다른 한쪽에서는 쌀을 비롯해 소, 돼지, 닭고기와 남해의 산물인 대구, 고둥, 소라, 청어까지 맛보았다.
또 일반 계층이 삼베로 짠 겉옷을 대충 걸친 반면 지배층은 비단옷으로 치장하고 왕관이나 금귀걸이, 팔찌 등으로 모양새를 냈다.
대가야인들의 의생활은 자급자족형이었다.
대체로 고구려, 백제, 신라와 크게 다르지 않아 일반 계층은 주로 바지, 치마, 저고리를 입었으며 기본 옷감은 가정에서 직접 짰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경북 고령 지산동 33, 34호와 쾌빈동 4호, 본관동 E호분 등 상당수 무덤에서 실을 뽑거나 감는 도구인 가락바퀴(紡錘)가 나온데서 미뤄 볼 수 있다.
삼베로 짠 옷감과 고운 직물, 가죽 등도 의류에 사용됐다.
지산동 44호분 토기위에 삼베로 여겨지는 거친 천, 45호분 갑옷과 관모 안쪽에 편직의 굵은 마포와 발이 고운 실로 조밀하게 짠 직물, 가죽을 댄 흔적 등이 나타났기 때문.
지배층의 의류도 유물과 문헌을 통해 추정할 수 있다.
지산동 32NW-1호분 고리자루 큰 칼의 자루와 손잡이에 고운 직물이 붙어 있고, '변·진(한)은 뽕나무를 재배하고 누에치기를 하며 겸과 포를 만들 줄 안다'는 중국사서 '삼국지'의 기록이 있다.
실크 종류의 '겸'과 마(麻)의 일종인 '포' 등 고급 직물이 지배층 옷감으로 사용된 것.
그렇다면 대가야인들은 뭘 먹고 살았을까. 농사는 물론 고기잡이, 사냥, 가축 사육 등도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곳곳에서 흔적도 나타났다.
지산동 44호분에서 기장이 나왔고, 경남 산청 소남리와 진주 상촌리 고분에서 벼낟알이 출토됐다.
'삼국지'도 '변·진한은 오곡과 벼를 재배했다'고 기록, 쌀을 비롯해 보리, 콩, 조, 수수, 기장 등 오곡을 재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가야는 도읍지 고령을 중심으로 낙동강과 그 지류(가천, 야천, 회천, 황강, 남강) 연안에 논농사를 짓고, 분지 구릉사면에 밭을 일궜을 것으로 보인다.
300년대 이후 철제 농기구의 확산은 농업생산력을 크게 높였고, 여기서 나온 농산물이 주식이었다.
농경도구로는 곡물을 수확하거나 풀을 베는 낫이 가장 일반적이었고, 쇠로 만든 삽, 괭이, 쇠스랑, 가래, 살포 등도 사용됐다.
쇠스랑은 논갈이 작업에, 삽과 가래는 논을 갈거나 물길을 파는데, 살포는 논 물꼬를 트거나 막는데 썼다.
400~500년대 백제나 신라는 수리시설을 확대해 대규모 논을 개발하고 소를 이용해 경작, 가야도 우경이 이뤄졌을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비온 뒤엔 가끔 잉어도 올라오지요".
고령읍 장기리 회천변. 한 노인이 그물을 힘껏 던지고 있었다.
붕어 대여섯마리를 끌어올린 이 노인은 "5~6년전만 해도 낙동강을 드나드는 물고기 종류가 다양했지만, 주변에 주택이나 공장이 들어선 뒤 많이 사라졌다"고 했다.
옛 대가야인들도 여기서 작살이나 어망으로 고기를 잡았을 터. 가야 유적에서는 어망추가 흔히 나오고, 지산동 44호분에서는 누치 뼈가 15개 그릇속에 담겨 있었다.
중국 흑룡강 등 주로 큰 강에 분포하는 누치는 국내에서는 낙동강 수계에 가장 많이 서식하는 잉어과의 민물고기. 낙동강과 그 지류에서 누치, 잉어, 붕어 등을 잡은 대가야 어로의 흔적이었다.
또 지산동 44호분의 닭뼈, 경남 합천 옥전고분군의 말 투구와 갑옷, '소를 잡아 제사지냈다'는 경북 울진과 영일 '신라비'의 기록으로 봐 닭을 비롯해 돼지, 소, 말도 집에서 길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함께 가야 고분에서 나온 사슴, 노루, 꿩, 멧돼지 등 동물뼈와 활, 창 등으로 미뤄 사냥도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야인들의 주거형태와 관련, '삼국지'는 '초가 흙집을 지어 거처했는데 모양은 무덤과 같고 문이 위에 있으며 가족이 함께 살았다'고 적고 있다.
대가야인들의 집터가 아직 발굴된 적은 없지만, 일반 계층은 초기에 땅을 파고 그 위에 거적을 덮은 움집에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벼농사가 보편화되면서 볏짚 또는 갈대로 이엉을 엮어 지붕을 인 초가에 살았다는 것. 반면, 대가야 궁성터로 알려진 고령읍 연조리에서 기와와 벽돌, 화덕이 출토됐고, 지산리 주산 정상부근의 산성터에서도 가야시대 기와가 나았다.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대가야를 공격할 때 '전단량'이란 성문으로 들어갔다는 내용이 나온다.
지배층은 궁성안에 기와, 벽돌 등을 사용해 지은 집에 살았다는 것.
대가야인들은 의식주 생활과 아울러 각종 농경의례를 치르고, 해안세력과 교역도 벌였다.
노중국 계명대(사학) 교수는 "5월에 작물의 씨를 뿌리고 10월에 추수를 한 뒤 모여서 제사를 지내고 춤을 추고 술을 마셨다"고 말했다.
지산동고분에서는 남쪽 바다의 산물인 도두럭 고둥, 소라, 바닷게, 대구, 청어, 굴 등 다양한 생선뼈와 조개류가 나왔다.
해안지역 진출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내륙지역 대가야는 민물고기를 비롯 쌀, 기장, 보리같은 곡물을 해안지역 가야에 넘기고, 그 대가로 바다고기, 조개류, 소금 등을 받았을 것이다.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고령·김인탁기자 kit@imaeil.com
사진·안상호기자 shahn@imaeil.com
사진:경북 고령읍 야천(안림천). 천렵에 나선 젊은이가 그물을 힘껏 던지고 있다. 1천700여년전 대가야인의 모습도 이와 비슷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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