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매미'가 한바탕 뒤흔들고 간 자리에 크고도 깊은 상처들이 입을 벌리고 있다.
지난 해 '루사'가 할퀸 자리를 채 다 꿰매기도 전에 상처가 덧나버렸으니 그 아픔이 극심하다.
수마에 가족을 앗긴 사람들, 봄.여름내 까맣게 탄 얼굴로 허리가 부러져라 키워온 농작물들을 잃고 애간장이 녹아내린 농부들, 전재산이나 다름없는 집이 뻘밭으로 변해 망연자실한 서민들, 가뜩이나 하루하루 정신력으로 버텨오는 판에 광풍으로 치명상마저 입은 영세.중소기업인들…. 그들이 겪고 있을 산더미만한 고통을 생각하면 명치끝이 답답해진다.
가을 초입이면 통과의례처럼 태풍이 들이닥친다.
건망증 심한 인간들을 향해, 수확의 계절을 선물받으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대자연의 엄중한 교훈인가. 이번 '매미'는 자연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다시 한 번 절감케 한 '사건'이다.
그러나 자연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농무(濃霧)가 온 천지를 뒤덮을 때는 한 치 앞도 안보이지만 아무리 짙은 안개라도 해가 뜨면 걷히기 마련임을 말해준다.
재앙을 몰고 온 '매미'가 물러간 뒤 하늘은 '내 언제 그랬더노?'라는 듯 청청하다.
걸핏하면 구름 뒤로 숨바꼭질하던 해도 모처럼 쨍한 얼굴이다.
지겨운 비로 눅눅해진 장롱속 이불이며 옷가지 등을 꺼내 말리느라 집집마다 주부들의 손길이 바쁘다.
습기 머금은 바람에 며칠 걸려 시들시들 마르던 빨래가 차 두어잔 마실 시간에 바짝 마르는 것이 새삼스럽다.
게다가 뽀삭뽀삭하게 마른 빨래의 그 신선한 감촉이란!
예전 이런 날이면 엄마들은 옥양목 이불홑청을 뜯어 도랑가 청석에 대고 방망이로 두들겨 빤 뒤 잿물에 푹푹 삶아 마당을 가로지른 빨랫줄에 널어 말렸다.
이때 축 처지기 쉬운 빨랫줄을 한가운데쯤서 받쳐주는 것이 바지랑대. 길고 단단한 나무 막대기인 바지랑대는 빨랫줄의 높이를 조절하기도 하고 무게중심을 잡는 역할도 했다.
바지랑대 높이 매달린 빨래들이 산들바람에 춤추듯 펄럭이던 모습은 도시인들의 가슴 속에 살아있는 정겨운 고향풍경이다.
바지랑대는 빨래 뿐 아니라 잠자리며 참새 따위가 날개접고 한숨 졸다 가는 쉼터 역할도 했다.
또한 밤이 익을 무렵이면 밤송이를 털어내는데 쓰이기도 했고 끝에 주머니를 달면 감따기에도 제격이었다.
겉보기엔 보잘 것 없는 막대기지만 여러모로 쓸모있는, 사람으로 치면 '멀티 플레이어'같은 존재였다.
빨래가 쉬 마르는 이런 날, 뜬금없이 바지랑대가 있는 마당 풍경이 그리워진다.
편집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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