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매미'가 곤충 매미의 역사처럼 지나갔다.
6년이나 땅 속에서 준비했다가 일주일이란 짧은 순간에 맹렬하게 울다가 사라지는 곤충 매미처럼, 태풍 '매미'도 태평양에서 서서히 성장하고 뜸들이다가 순식간에 북상하여 몇 시간 사이에 한반도를 두들기고 지나간 뒤, 그 생을 마쳤다.
그의 삶은 짧았으나 남겨놓은 상처는 너무나 크다.
태풍과 홍수의 역사가 어제 오늘의 것만은 아니다.
역사 기록을 보면 수해의 자취는 어느 시대나 존재했다.
낙동강 유역을 수마가 할퀴고 지나간 일은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수없이 반복되었고, 안동이 자랑하던 영호루 큰 누각도 네 번이나 떠내려갔다.
그렇다면 이보다 훨씬 낮은 위치에 있던 일반 주택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 한강 유역을 공포로 몰아넣은 홍수로는 1925년 을축대홍수가 대표적이다.
7월 15일부터 4일 동안 500㎜나 쏟아 부은 폭우로 인하여 강원도 인제는 도시 전체가 떠내려가버려 나중에 자리를 옮겨 새로 건설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서는 한강 제방이 터지면서 용산지역이 침수되고 남대문 근처까지 물이 들어찰 정도였고, 노량진에는 떠내려가는 지붕 끝만 보였다.
이런 지경에 보름 뒤에 다시 큰비가 닥쳐 사망자가 1천명을 넘어선 것이 바로 을축대홍수였다.
영남지역에서 가장 큰 홍수로는 1925년 을축대홍수와 1934년의 갑술대홍수를 들 수 있다.
을축년의 경우는 한강 유역보다 3일 먼저 시작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경부선이 10일 동안 불통될 지경이었으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그리고 갑술대홍수는 영남지역에 집중적인 피해를 가져다 주었고, 인명피해만 따져도 787명이나 되었다.
당시 대구에서는 금호강과 신천이 범람하였다.
동화사의 건물들이 무너지고 백안 마을이 물에 휩쓸려 사라진 때가 바로 이 때라는 기록을 본 기억이 있다.
이어서 해방 후의 수해라면 누구나 기억할 1959년의 사라호 태풍이었다.
이번 매미와 비슷하게 추석명절에 들이닥친 이 태풍도 남해안을 강타하고 남부지역을 아수라장으로 만들면서, 사망자만 781명을 기록할 정도였다.
지나간 세월에도 숱하게 많은 태풍과 홍수가 몰아닥쳤듯이 앞으로도 줄곧 풍수해가 닥칠 것이다.
그렇지만 태풍이 거듭 닥친다고 하여 피해도 계속 당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수재의 역사는 그러한 시련을 미리 예방하고 철저하게 사후를 수습하라고 우리에게 주문하고 있다.
그러면 선인들은 이러한 환란을 어떻게 극복하려 했을까. 우선 굶주린 사람을 먹였고, 병든 자를 치료했다.
기록에 나타나는 의창.상평창.구황청.진휼청.제위보.제위도감.활인서 등은 그러한 구휼기관이었다.
국가는 이런 재난을 극복하기 위해 비상 재정을 풀었고, 구휼기관을 통해 백성을 구제하였다.
그런 다음으로 근본적인 대책으로 제방을 쌓기에 나섰다.
대구에서는 대표적인 사례가 신천의 축조였다.
1778년(정조3)에 대구 판관 '이서'가 개인 재산을 털어 제방을 쌓아 물길을 돌리게 하였다.
이에 감격한 주민들이 제방이름을 '이공제'라 하고, 새로 만든 내를 '새내' 또는 '신천'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의 공덕비를 신천변에 세웠으니,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또 1934년 갑술홍수를 당해서는 금호강과 신천의 범람을 이겨내기 위해 제방공사에 들어갔고, 1936년 7월에 그것을 완공시킨 것도 그러한 대비책의 하나였다.
지금 정부에서 수해지역을 특별재해지역으로 선포하는 것을 적극 검토하면서 긴급 지원책을 마련하느라 분주한 모양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한 가지 염려되는 점도 있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문제점들이 바로 그것이다.
복구작업이 항구적이지 못하고 임시방편적이라는 것과 행정누수, 자금누수가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지난해의 수해 복구 작업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아서 발생한 인재도 있고, 또 땜질식 복구작업 때문에 또 다시 닥친 재난도 있다고 들려 온다.
주먹구구식 복구작업이나 빼돌린 자금 이야기가 이번에는 없었으면 좋으련만, 그럴 보장이 없다.
그래서 염려가 앞선다면 과연 지나친 기우일까?
조선시대 국왕들은 대규모의 풍수해가 났을 때, 백성을 위문하고, 그 원인이 자신의 부덕함에 있다고 자인하면서 근신하였다.
그러니 신하들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경제부총리가 마침 휴가차 제주도를 방문하여 즐긴 골프여정이 수해와 겹치는 바람에 구설수에 올라 있다.
숙종과 영조가 재난을 당하자 술 마시고 노래하는 일을 금지시켰고, 심지어 국가 최고의 행사인 종묘제향에서도 술 대신에 물로 제사를 올린 일을 귀감으로 삼았으면 좋겠다.
김희곤(안동대교수 한국근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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