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아!대가야(11)-흙이 빚어낸 신비

걀쭉한 목, 동그란 엉덩이, 잘록한 허리, 도톰한 젖꼭지…. 대가야 미인의 몸매가 이러했을까.

목긴 항아리(長頸壺)의 몸통은 풍만한 엉덩이였고, 목은 목이 아니라 부드러운 곡선으로 졸린 허리였다.

마치 허리띠를 두른 듯 물결무늬의 띠를 3겹으로 둘렀다.

몸통과 허리를 연결하는 S자형 곡선미가 돋보였다.

사발모양 그릇받침(鉢形器臺)은 길게 뻗은 목덜미 같은 대를 받쳤고, 항아리와 굽다리 접시(高杯)는 도톰한 젖꼭지를 닮은 뚜껑 손잡이가 달려 눈길을 사로잡았다.

웅장한 원통모양 그릇받침(筒形器臺)은 세로로 새겨진 네 갈래의 뱀 모양 띠가 화려함을 뽐냈다.

곡선의 부드러움과 우아함이 묻어난 대가야 토기의 자태. 흙이 빚어낸 신비로움이었다.

부드러운 손길로 빚어진 흙. 60여일 동안 몸을 말리고, 5~6일 밤낮으로 굽힌 뒤 1천230도의 불길 속에서 마지막 10시간을 견딘 산고 끝에 마침내 숨을 쉴 수가 있었다.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 흙에 혼을 불어넣는 과정에는 그렇게 100일 안팎의 지난한 고통과 땀이 함께 했다.

경북 고령군 운수면 신간리, 전통도예원 '고령요'. 여기서는 1700여년을 거슬러 대가야 토기가 부활하고 있었다.

그 현장은 백영규(65)씨가 지키고 있었다.

아호도 그럴 듯했다.

흙 사람, '토인(土人)'.

백씨는 "토기와 도자기는 원료는 다르지만 그 만드는 기법이나 예술 혼은 서로 연결된다"며 "조선백자의 맥도 분청사기와 고려청자, 또 그 이전의 가야 토기를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수많은 시간과 우여곡절 끝에 하나의 제대로 된 토기가 탄생하듯 백씨의 50년 도예인생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일제시대 일본에서 태어난 백씨가 아버지의 고향으로 되돌아오기까지 걸린 기간은 무려 52년. 고령 덕곡면의 도공이던 아버지가 1915년 일본으로 건너간 뒤 해방 후 다시 돌아와 자리를 잡은 곳은 경북 금릉군 구성면 임천리. 초등학교를 졸업한 백씨는 여기서 6.25를 맞았고, 전쟁이 끝난 뒤 열다섯 나이로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조선시대 경기도 광주의 '관요'에서 일하던 도공의 후손 4명과 함께 조선 백자를 재현하는데 온 힘을 쏟았던 것. 그러나 50년대 말 스테인리스 그릇 등이 쏟아지면서 너도나도 도자기에서 손을 놨고, 백씨도 한동안 방황했다.

그는 도자기 재현 붐이 일던 67년 다시 경북 문경에 가마터를 잡고, 8년간 고려와 조선시대 (막)사발을 굽는데 전념했다.

백자와 사발 제작기법을 익힌 그는 76년 다시 경기도 이천으로 옮겨 고려청자 재현작업에 뛰어들었다.

이후 79년부터 10년간 대구공업전문대 '요업과'에서 도자기 강의를 하면서 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후학 양성과 고령 토기요지 답사과정에서 조선백자, 고려청자, 막사발의 맥도 결국 순수 점토로만 만든 가야 토기가 그 밑바탕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 이렇게 해서 백씨는 아버지의 고향이자, 대가야의 도읍에 둥지를 틀었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6년 만에 대가야 토기의 재현에 성공했다.

물레를 돌리는 그의 모습에서 대가야 토기 장인의 혼을 엿보는 듯 했다.

백씨가 말하는 대가야 토기는 '강도가 높고 질박하면서도 실용성과 함께 곡선미를 잘 드러낸다'는 것. 섬세하고 화려한 고려청자, 투박하고 서민적인 분청사기, 티없이 맑고 순수한 조선백자와 다른 특성이었다.

대가야 토기에 사용된 점토는 고령 일대에서 지하 1~1.5m만 파면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흙이다.

특히 입자가 굵은 점토를 사용하기 때문에 유약을 바르는 도자기처럼 빛이나 열이 아니라 자연풍으로 말려야 하고, 가마 속에서 장기간 열을 가해야 한다.

돌멩이나 이물질을 가려낸 점토를 기포가 생기지 않도록 5~6시간 반죽을 한 뒤 물레에 대고 모양을 낸다.

가장 까다로운 공정은 다음의 건조단계. 순수한 흙만 사용하기 때문에 잘못하면 부서지거나 갈라지기 십상이므로, 빛이 들지 않고 통풍이 잘 되는 곳에서 말려야 한다.

봄, 가을은 한 달, 여름과 겨울엔 두세 달이 족히 걸린다.

가마에서 굽는 과정도 도자기와 다르다.

초벌구이(800도)후 유약을 바른 뒤 재벌구이(1천300도)를 하는 도자기와 달리 처음 1~2도에서 900도까지 서서히 열을 가하는데만 5~6일 밤낮을 지새야 한다.

예열을 거친 뒤 마지막 날에는 1천230도의 열을 10시간 동안 가한다.

점토는 도자기보다 열을 견디는 '내화도'가 약하기 때문에 낮은 열을 지속적으로 가해야 하고 이럴 경우 강도는 오히려 도자기보다 높다.

이렇게 만들어진 대가야(양)식 토기가 바로 사발모양 그릇받침, 목긴 항아리, 굽다리 접시, 원통모양 그릇받침, 납작한 뚜껑접시(蓋杯) 등이다.

뚜껑있는 목긴 항아리는 대가야의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낸 토기. 둥근 몸통에 긴 목이 달린 이 항아리는 가운데가 졸린 듯 잘록하고, 그 안에 물결무늬의 촘촘한 띠가 3단으로 둘러져 있다.

입구는 바깥으로 퍼져있고, 그 위에 단추나 젖꼭지 모양 뚜껑이 덮여 있다.

뚜껑없는 목긴 항아리는 입구가 나팔처럼 더 벌어진 것이 특징.

뚜껑있는 목긴 항아리와 짝을 이루는 사발모양 그릇받침은 항아리를 올려놓는 입구가 깊숙하고 위로 넓게 벌어졌다.

사발입구 바깥에는 역시 촘촘한 물결과 바늘무늬가 3단으로 배치되고, 팔자형으로 벌어진 받침대에도 3, 4단의 물결무늬가 새겨져 있다.

또 받침대에는 각 단마다 삼각형이나 종 모양의 창이 아래위로 나란히 또는 엇갈리게 뚫려 있다.

원통모양 그릇받침은 제사나 의례용 토기로, 중.대형 무덤에서만 발굴됐다.

사발모양 그릇받침을 엎어놓은 듯 넓게 퍼진 받침대 위에 아래위 폭이 비슷한 원통모양 몸통을 세웠다.

그 위를 볼록 솟게 한 다음 굽다리 접시를 올려놓은 모양이다.

몸통과 받침대에는 삼각형, 역삼각형 또는 (직)사각형 창이 뚫려 있는데 주로 몸통에는 아래위로 나란히, 받침대에는 서로 엇갈리게 돼 있다.

몸통 어깨에서 받침대 위까지 뱀 모양을 형상화한 세로 띠를 네 군데 대칭으로 붙인 것이 신비감을 더한다

굽다리 접시는 입구가 얕고 납작하며, 뚜껑에는 점선무늬가 손잡이를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돌려져 있는 게 특징이다.

나팔모양(팔자형)으로 벌어진 굽다리 받침대에는 (직)사각형 창이 아래위 2단으로 나란히 뚫려 있거나 1단으로 길게 배치돼 있다.

또 납작한 뚜껑접시는 두 개의 납작한 토기를 아래위로 마주 덮은 것 같은 모양의 토기이다.

이러한 대가야 토기는 고려청자, 조선분청사기, 조선백자로 그 맥을 이어왔고, 지금도 왕들의 무덤뿐 아니라 후손들의 손길을 받아 새로 태어나고 있다.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김인탁(고령)기자 kit@imaeil.com

사진 안상호기자 shahn@imaeil.com

사진:오늘도 대가야 토기 재현에 혼신을 쏟고 있는 백영규씨. 질박하면서도 아름다운 곡선을 그려내는 그의 모습에서 1700년전 대가야 장인의 혼을 엿보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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