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호 태풍 매미는 불청객이었다.
불청객이면서 혼자 오지도 않았다.
기상관측 사상 최고의 강풍과 집중 호우와 함께 찾아와서 영남 땅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곳 경북 청도도 태풍의 중심이 지나간 자리여서 피해가 속출했다.
그 유명한 청도과일과 농작물, 가로수와 산속의 아름드리 나무도 뽑히고 부러져 전쟁터를 연상케 했다.
근무 중인 동곡초등학교 역시 학교를 지켜주던 아름드리 소나무 네 그루가 힘없이 쓰러져 버렸다.
그보다 더 크고 가지와 잎이 많은 교문 앞 은행나무와 여리디 여린 어린 느티나무는 끄떡없이 제 자리를 지키는데 소나무 네 그루는 왜 쓰러지고 말았을까?
이유는 뻔했다.
평소 위용을 자랑하고, 겨울철에도 푸르름을 자랑해서 학생들에게 끈기와 푸른 꿈을 일깨워 주던 교목 소나무였지만, 넘어진 뿌리를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뿌리째 뽑힌 소나무는 평소에도 어떻게 서있을 수 있었을까 하고 의심할 정도로 뿌리가 약하기 짝이 없었다.
애국조회 시간에 뿌리가 약하면 바람을 견딜 수 없다는 훈화를 하면서 평소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뿌리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쓰러진 교목이 마지막까지 학생들에게 유언처럼 교훈을 심어주기를 바라면서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기회로 삼았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어린 아이의 울음만은 아니다.
벼 한 포기라도 지키려고 태풍 속에서 물꼬를 보는 농부와 낡은 배 한 척을 지키려 태풍과 맞서서 손바닥이 벗겨지는 어부들의 아픔과 먼 이국 땅에서 쌀을 지키려고 할복 자살까지 하는 이경해 회장의 죽음앞에 재해가 일어나면 연례 행사처럼 장관이 골프 치느라 대책회의에도 참석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와 의회 의원이 수재민들의 아픔을 외면한 채 외유를 떠났다는 이야기, 여기에 태풍이 상륙한 그날 뮤지컬을 봤다는 대통령의 이야기는 우리를 참으로 슬프게 한다.
자식처럼 돌보던 과일을 버리는 농부와 농사를 망친 어느 농부의 자살소식과 해일이 닥쳤는데도 민방위 훈련때는 그렇게 잘 울리던 경고 사이렌 한 번 울지 않았다는 방송, 물난리 속에 구호품은 가뭄이라는 신문기사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시인 바이런이 '인간이여! 너는 미소와 눈물 사이를 왕래하는 시계의 추다'라고 했듯이 우리를 기쁘게 하는 아름다운 소식도 들린다.
국방의무에 충실하던 군인과 의경, 예비군은 물론 학업에 열중하던 학생들까지 수해를 당한 곳으로 달려가 비지땀을 흘리면서 쓰러진 벼를 일으키는 모습과 생업을 미루고 수재민에게 약을 발라주는 약사, 라면이라도 끓여드려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 달려왔다는 어느 주방장, 가까운 곳에서 작은 것을 챙겨주는 수많은 자원 봉사자들의 온정의 손길이 너무나 크게 보이며, 우리를 기쁘게 한다.
지난해 루사가 남긴 상처를 싸매며 수해 복구를 도와준 2만여명의 자원 봉사자들을 기리기 위해 '그대는 아름다운 사람입니다'라는 보은의 비를 세운 김천 지례 주민들 역시 너무나 아름다운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며 우리를 기쁘게 한다.
출근길에 며칠째 보는 노부부의 모습이, 굽은 허리를 손으로 두드리면서 넘어진 고추를 정성스레 일으키는 그 손길이 우리를 안타깝게 만든다.
그러나 태풍의 힘은 히로시마 원폭의 만 배에 달한다고 하지만 사랑의 힘은 이보다 더욱 크다는 사실만은 틀림없다.
문득 어느 선사의 글귀가 생각나서 옮겨 본다.
'제 갈 길을 찾아 쉬지 않고 나가는 게 물인 기라. 어려운 굽이를 만날수록 더욱 힘을 내는 게 물인 기라. 맑고 깨끗하여 모든 더러움을 씻어주는 게 물인 기라. 넓고 깊은 바다를 이루어 고기를 키우고, 되돌아 이슬비가 되는 게 바로 물이니 사람도 이 물과 같이 우주 만물에 이익을 주어야 하는 기라.물처럼 살거래이, 물처럼 사노라면 후회 없을 기라'.
매미에 물리고 물에게 혼난 지금, 이들이 주는 교훈을 생각하면서 뿌리깊은 교육을 통해 살 맛 나는 세상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몇 번이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삶속에는 매미와 같은 태풍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많은 종류의 태풍을 이길 수 있는 방안은 역시 교육에서 찾아야 하겠다는 생각은 내가 교육자여서만은 아닐 것이다.
매미보다 더 거센 사랑의 강풍과 온정의 홍수가 태풍보다 더 큰 힘으로 전국을 강타하기를 기원해 본다.
김한성〈청도 동곡초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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