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일제 강점기 시인 '이찬' 詩전집 나와

1920, 30년대 일본의 수탈을 견디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중국 만주나 시베리아로 길을 떠났다.

아버지는 짐을 등에 지고, 어머니는 보따리를 머리에 인채 어린 자식들의 손을 이끌고 정든 고향을 등졌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남의 나라 땅으로 수천리 길을 떠난 그들의 눈에선 피눈물이 쏟아졌다

한반도 북쪽인 함경도 북청에 살던 한 시인은 유랑 길을 떠나는 겨레의 비참한 모습을 목격하고, 이를 시작품 속에 담아냈다.

'가구야 말려느냐 가구야 말어/너는 너는 참 정말 가구야 말려느냐// 이민이라 낼 아침 첫차에 실려/이역 천리 저 북만주 가구야 말려느냐// 아 잡아보자 네 손길 이게 마지막이냐/이리도 살뜰한 널 내 어이 여히는가// 야속하다 하늘도 물은 왜 그리 지워/너희네 부치든 논밭뙈기 다 빼낸다 말이냐// 허드라도 행랑살이 내집 살림 저닥지 않다면/내 너를 보내랴만 꿈속엔들 보내랴만// 아아 다없고 황막한 그 땅 네 얼마나 괴로우랴/철철 추위 혹독한 그 땅 네 얼마나 쓸쓸하랴// 사시장장 가여운 네 생각 내 어찌 견디리/자나깨나 그리운 네 생각 내 어찌 배기리'('북만주로 가는 월(月)이' 부분). 소작지를 뺏기고 북만주로 떠나가는 월이네의 슬픈 삶의 내력을 생생하게 진술하고 있다.

이 시를 쓴 이찬(1910~1974)의 시전집이 최근 출간됐다.

이동순 영남대 문과대 교수와 박승희 영남대 '20세기 민중생활사' 연구단 연구교수가 엮은 '이찬詩전집'은 남북 분단으로 '매몰'된 한 시인을 양지로 끌어냈다는 측면에서 의의가 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30년대 초반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 시인은 '카프'조직에서 활동한 좌파계열의 대표적 시인으로 꼽히고 있다.

그의 진면목은 30년대 후반 고향인 북청에서 펴냈던 '대망' '분향' '망양' 등의 시집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이 시집들은 북방지역 유랑민의 삶과 애수, 그리고 식민지 민중들에 대한 비극적 형상을 주로 담아냈다.

때문에 그의 시 정신은 일제강점기의 민족적 삶과 시대 현실에 항상 맞닿아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해방 후 시인은 북한 문화행정의 대표적 관료로 활동했으며, 북한 문학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북한에서 활동한 그의 이력 때문에 이찬의 작품은 분단 수십 년 동안 남쪽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문학으로 자신의 시대를 충실하게 반영하고 증언했던 시인으로 이찬을 인식한 편자들은 그의 전집 발간에 뜻을 두고 10년동안 그의 작품을 하나 둘 찾아 모았다.

하버드, 시카고, 버클리대학 등 미국을 비롯 중국과 일본, 국내를 뒤지고 다녔다.

그렇게 해서 총 285편에 이르는 시작품과 세 편의 산문, 작가와 작품 연보, 해설과 상세한 낱말풀이까지 포함한 그의 전집을 세상에 내놓았다.

편자들은 "이찬의 시는 분단 오십여 년의 기나긴 세월 동안 한국문학사의 어느 장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우울한 매몰의 시간을 경험했다"며 "그의 시전집 발간을 통해 남북한 문학작품을 동시에 조망하는 특별한 계기가 되는 것은 물론 민족문학사의 복원이 더욱 활기를 띠기 바란다"고 밝혔다.

이대현기자 sky@imaeil.com

▨시인 이찬은…

1910년 함남 북청에서 태어남

1924년 경성 제2고보 입학

1927년 조선일보 학생문예 공모에 시 '나팔' 당선돼 등단

1929년 일본 와세다대학 노문학과에 입학

1931년 연희전문 입학

1932년 '문학건설' 창간에 참여했다가 '별나라' 사건으로 일경에 체포됨

1937년 시집 '대망'을 중앙서관에서 상재

1938년 시집 '분향'을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펴냄

1940년 시집 '망양'을 박문서관에서 펴냄

1945년 '조선프로레타리아예술동맹'에 가담. 함남인민일보사 편집국장으로 활동

1946년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서기장에 피선, 문화선전성 군중문화국장 역임.

1974년 사망

1981년 북한에서 시인에게는 최고의 명칭인 '혁명시인' 칭호를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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