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운동회를 치른 경북 청도군의 한 초등학교. 만국기가 펄럭일 뿐 덩그런 운동장은 을씨년스럽다.
'동네잔치'를 찾아온 뜨내기 장수도 없고 펄펄 끓는 국솥도 없다.
풍선 장수도 야바위꾼도 없다.
젊은 엄마 아빠는 손에 꼽을 정도고 관중이래야 동네 노인들과 도시에서 온 자원봉사자들이 대부분이다.
운동회는 '엄마와 함께 달리기' 순서가 시작되면서 더욱 우울해진다.
서른 중반의 엄마 달리기에 칠순의 할머니가 어기적어기적 나선다.
할머니를 모셔온 어린이는 그나마 배짱이 좋은 녀석이다.
아예 운동회 참가를 거부하는 어린이들도 있다.
점심시간. 학교에서는 도시락을 싸오라고 했다.
평소 학교급식에 질린 아이들을 배려한 것이다.
부모와 함께 온 아이들이 나무 그늘에 앉아 맛있는 도시락을 먹는 동안 부모가 없는 어린이 4명은 슈퍼에서 사온 빵과 초코파이를 씹었다.
한번도 도시락 걱정을 해 본 일이 없는 할아버지는 운동회 날 학교급식이 없자 빵 값을 손자 손에 쥐어 주었다.
일일 엄마 자원봉사에 참여했던 손모(대구시 중구 남산3동)씨는 차라리 단체급식을 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학교 전교생 60명 중 20명이 엄마아빠와 함께 살지 않는다.
이 중 15명은 부모의 생활고 이혼 별거 등으로 도시에서 귀향한 아이들이다.
도시의 부모들이 시골의 할아버지 할머니 댁에 자녀를 맡긴 것이다.
이 지역의 또 다른 초등학교도 상황은 비슷하다.
2학년 10명 중 3명이 엄마아빠와 함께 살지 않는다.
읍면 지역엔 조부모와 함께 사는 초등학생이 한 학년에 3,4명에 이를 정도다.
읍면 지역 초등학교의 학급 당 평균 학생수가 20명인 점을 감안하면 적은 수가 아니다.
읍면 지역은 대체로 한 학년에 1,2학급이 고작이다
이 학교 3학년 창식(가명)이는 숙제를 하지 않는다.
창식이 뿐만아니라 엄마아빠가 없는 이 학교 어린이 절반은 숙제를 하지 않는다.
"숙제 안 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아요". "선생님이 꾸중하시지 않아?" "괜찮아요". 창식이는 선생님의 꾸지람을 흘려 들을 뿐이다.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숙제도 많다.
선생님은 책만 잘 보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지만 창식이는 너무 어렵다고 말한다.
칠순이 넘은 할머니에게 여쭈어보지만 할머니는 통 못 알아듣는 눈치다.
요즘은 아예 묻지도 않는다.
"교사의 의도는 그렇지 않지만 가정체험학습, 가족신문, 조사숙제는 결국 엄마숙제가 되고 맙니다.
초등학생 혼자서 해내기는 현실적으로 어렵죠". 경북 구미의 한 초등학교 홍모 교사의 말이다.
'선생님은 아버지의 직업에 대해 조사해오라고 해요. 아버지를 못 본지 오래됐어요. 우리 아버지는 노숙자예요. 텔레비전에서 봤어요. 길에서 자는 사람 노숙자 맞죠? 방학이 싫어요. 방학이나 연휴 때 선생님이 가정체험학습 숙제를 내시거든요. 나들이 함께 갈 사람이 없어요. 할머니는 맨날 일해요'. 창식이의 숙제고민이다.
창식이는 학교 수업을 마치면 해가 질 때까지 밖에서 논다.
학원도 태권도도 문제집풀이도 없다.
학교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 초등학교는 방과 후 '특기적성 교육'이나 '부진아 학습'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결손가정 어린이와 저소득층 어린이들에게는 무료다.
그러나 특기적성 교육에 참여하는 아이는 드물다.
"지독하게 말을 안 듣는다". 결손가정 어린이들을 이끌어보겠다고 나섰다가 자신의 무기력함에 실망했다는 한 교사의 푸념이다.
"사랑 받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충고나 매는 무의미합니다". 이 교사는 사랑없는 충고의 무익함을 체험으로 알았다.
초등학교 3학년인 창식이의 꿈은 중학교 졸업이다.
중학교를 졸업하면 돈벌이에 나설 작정이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돈을 많이 벌어야 가족이 함께 살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초등학교 3학년 짜리 입에서 나온 말치곤 너무 각박하다.
경북 의성의 한 초등학교는 전교생 73명 중 26명이 편부 편모 슬하에 있거나 부모가 없다.
이 학교 6학년 영미(가명)는 튀는 옷차림과 남자 친구 사귀기로 유명하다.
중학생과 어울려 다니며 스스로 초등학생을 벗어났다고 말한다.
친구들 앞에서 담임 선생님을 아빠라고 큰소리로 부르기도 한다.
담임선생님 곁에 꼭 붙어서 선생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고 과시하거나 갖가지 거짓말을 한다.
영미는 일기장에 새엄마를 '아줌마'라고 적고 있다.
새어머니를 가족으로 인정하지 못해 아버지로부터 꾸지람을 자주 듣는다.
영미는 아버지를 미워한다.
가족신문 숙제를 낸 경북 고령의 한 초등학교 교사에게 '가족의 정의는 무엇인가' 물었다.
나이 지긋한 여교사는 '가족이란 엄마와 아빠 그리고 자녀들로 구성된다'고 친절하게 설명한다.
이 반 학생들이 가족신문 숙제를 하려면 반드시 엄마와 아빠 그리고 형이나 동생의 근황을 넣어야 한다.
결손가정 어린이들이 최근 몇 개월 동안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부모의 근황을 어떻게 가족신문에 넣을 수 있을까?
OECD 국가 중 이혼율 3위 한국.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전국 1만2000가구를 대상으로 실시한 2002년 보육실태조사에 따르면 전체 아동 중 조부모나 친인척에게 맡겨진 어린이는 읍면의 경우 5.7%로 대도시(1.7%)의 세배를 웃돈다.
'가족이란 엄마와 너로 구성되기도 하며, 때로는 아빠와 너 그리고 너의 동생으로 구성되기도 하고, 때로는 할아버지 혹은 할머니와 너와 네 동생으로 구성되기도 한다.
…'미국 어린이 프로그램의 한 대목이다.
가족의 개념이 우리와 다르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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