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아!대가야(13)-극락을 향한 믿음

산중을 헤맨 지 벌써 여러 달 째였다.

어느날 이른 새벽, 하늘에 치솟는 붉은 기운을 느꼈다.

고개를 돌리니 안개 속에서 저 멀리 오색 무지개가 피워 오르고 있었다.

숲을 헤치며 무작정 그 방향으로 수십리 발길을 옮겼지만 냇물이 깊고 골짜기가 좁아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 때 마침, 여우 한 마리가 바위 위로 냅다 달렸다.

신기하게 여겨 뒤쫓아가 보니 산으로 둘러싸인 그 곳에 늙은 두 스님이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참선을 하고 있었다.

신라 애장왕의 명을 받은 신하들이 왕후의 병을 치료할 고승을 만나는 순간이었다.

해인사의 창건을 예고하는 서막이기도 했다.

가야산 해인사. 서로 뗄레야 뗄 수도 없는 산과 절이다.

해인사는 바로 대가야의 모태인 가야산 기슭에 세워졌다.

지금은 행락철이면 하루에도 수천, 수만 명의 쉼터가 되고 있지만, 인적은 없고 여우와 토기만 뛰놀던 시절도 있었으니…. 그 당시 해인사 창건에 얽힌 얘기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는 것.

해인사 관암 스님은 신라때 순응과 이정 두 스님이 왕후의 병을 낫게 하자 애장왕이 스님들의 소원대로 해인사 창건을 두루 지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고 말했다.

애장왕은 802년, 왕후가 등에 큰 부스럼이 생기자 이름깨나 날리던 수많은 의원을 부르고, 온갖 약을 써가며 왕후를 치료했다.

그런데도 별다른 효과가 나타나지 않자, 왕후를 치료할 사람과 희귀한 약초를 구하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에 신하들을 보냈다.

전국의 온 산을 헤매던 신하들은 수개월만에 절터를 물색하고 있던 두 고승을 만났다는 것. 이 신하들이 앞뒤 사정을 설명하자, 순응 스님은 오색 안개에서 오색실을 10m 가량 뽑아낸 뒤 실 한쪽 끝을 궁전앞 배나무에 매고, 다른 쪽 끝을 왕후의 아픈 부분에 대면 병이 낳을 것이라고 했다.

왕은 순응 스님의 처방을 받아 왕후의 병이 씻은 듯이 낫자 스님에게 소원을 물었고, 스님은 사찰을 지어 중생을 구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순응 스님이 사찰 건립을 직접 진두지휘했고, 중간에 입적하면서 그 뒤를 이어 이정 스님이 사찰을 완공시켰다는 것. 해인사는 그렇게 세워졌다.

그렇다면 해인사는 대가야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공교롭게도 대가야의 건국신화는 가야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건국신화는 또 최치원이 지은 순응과 이정 스님의 전기, 석순응전과 석이정전에 실려있다.

해인사를 창건한 스님의 전기에 대가야의 건국신화가 실려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결국 순응 스님과 이정 스님은 대가야의 후손일 가능성이 높고, 또한 대가야와 불교의 밀접한 관련성을 해인사의 창건기록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는 것.

해인사와 불과 2km가량 떨어진 경남 합천군 야로면 월광리. 가야산 줄기를 타고 흘러내린 야천(안림천)과 남북으로 흐르는 이천천이 모로 만나는 지점에 월광사가 있었다.

대가야의 마지막 월광태자가 망국의 한을 달랬다는 그 절이다.

아픈 역사를 삭이기엔 더 없이 한적한 터였다.

천년 풍상을 넘은 그 자리에 지금은 70대 한 보살이 절 텃밭을 가꾸고 있었고, 3층 쌍탑만이 말없이 영욕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대가야국 월광태자는 정견모주의 10세손이요 아버지는 이뇌왕이다.

이뇌왕이 신라에 구혼하여 이찬 비지배의 딸을 맞아 월광태자를 낳았으니 이뇌왕은 뇌질주일(이진아시왕)의 8세손이라고 적고 있다.

또 월광사는 야로현 북쪽 5리에 있고, 태자 월광이 창건한 것이다는 기록도 있다.

월광태자가 인연을 가진 또 하나의 절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거덕사는 해인사 서쪽 5리에 있다고 했고, 그 서쪽산 두 시냇물이 합치는 곳에 거덕사란 절이 있는데, 옛 대가야국 태자 월광이 결연한 곳이라고 기록한 좥석순응전을 인용하고 있다.

거덕사에서 불교에 귀의해 참선을 하던 월광태자가 월광사를 창건했다는 것. 대가야는 늦어도 멸망(562년) 전, 불교를 받아들였을 것이란 추정이 가능한 대목이다.

대가야와 불교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흔적은 무덤에서도 나왔다.

500년대 중반, 대가야의 도읍지인 고령의 주산 주능선이 남쪽으로 뻗어내린 끝자락에 무덤 1기가 축조됐다.

고령읍 고아리 골안마을을 감싼 산기슭에 자리한 벽화고분이다.

지산동 고분군과 연결되는 이 무덤은 가로로 땅을 파서 출입이 가능토록 문을 만든 횡혈식축조방식을 적용한데다 지배층 무덤이면서도 껴묻이 널이 전혀 없다.

순장풍습이 사라졌다는 것을 미뤄볼 수 있었다.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좥피안(극락)의 세계를 상징하는 연꽃 문양. 무덤 입구에서 시체를 안치한 돌방에 이르는 통로(길이 4.8m)의 벽과 천장에 연꽃 문양 11개가 그려져 있었다.

또 무덤 중앙의 관을 들여놓는 돌방인 현실의 천장에도 연꽃 문양이 남아 있었다.

이 무덤양식은 백제 송산리 고분과 무녕왕릉 등의 벽화고분을 닮은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분홍색, 녹색, 흑색, 갈색 등으로 채색한 연꽃 문양에서 무덤이 극락이란 사후의식이 엿보였다.

월광태자의 월광사와 거덕사, 그리고 고아동 벽화고분은 대가야의 불교적 세계관을 잘 드러내주는 자취다.

대가야인들은 이렇게 산과 돌과 물, 하늘과 태양을 숭배하며, 극락을 지향하는 불교 신앙까지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김인탁(고령)기자 kit@imaeil.com

안상호기자 shahn@imaeil.com

사진:대가야의 마지막 태자인 월광태자가 망국의 한을 달랬다는 경남 합천군 야로면 월광리 월광사. 지난날의 아픈 역사를 숨기려는 듯 소낙비와 운무가 취재진을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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