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론-조기 퇴직시대의 노인 복지

자연과학과 기술은 관계가 밀접하다.

그래서 모두 자연과학이 발전해야 기술도 발전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류 문명의 역사에서 먼저 나온 것은 자연과학이 아니라 기술이었다.

자연과학은 이미 나온 기술들이 어떻게 작용하는가 밝히면서 발전해왔다.

사회과학에서도 사정이 비슷하다.

근년에 크게 발전한 사회과학은 사회의 움직임에 대한 설명과 통찰을 제공했고, 그런 설명과 통찰에 바탕을 두고 전통적 정책들보다 훨씬 나아진 정책들이 나왔다.

이론적 기초가 사회과학의 다른 분야들보다 훨씬 튼실한 덕분에, 경제학의 공헌은 특히 두드러졌다.

월남전의 패배로 사기가 저하되고 방향 감각을 상실한 미국 군대를 수렁에서 건졌고 이제는 많은 선진국들에서 표준이 된 '지원병 군대', 전통적 사회안전망이 안고 있는 근로 의욕저상(disincentive) 문제를 해결한 '음소득세제', 교통 정체를 성공적으로 줄이는 '도로가격제', 대기 오염을 효과적으로 줄이는 '거래가능 오염권'과 같은 새로운 제도들은 모두 경제학자들이 창안한 것들이다.

근년엔 실험 경제학(experimental economics)이 많은 실제적 문제들에 대한 합리적 대책들을 내놓았다.

정부와 기업들이 정책이나 전략을 세우고 실행하기 전에 먼저 소규모 실험들을 함으로써, 실험 경제학 기법들은 정책이나 전략을 보다 합리적이고 정교하게 설계하도록 돕는다.

비행기를 설계하고 제작하기 전에 먼저 풍동에서 모형들을 시험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게 경제학 이론에 바탕을 둔 정책들은 일반 시민들에겐 좀 낯설게 느껴지지만 '상식'에 바탕을 둔 전통적 정책들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효과적이다.

그것들은 대체로 복잡해서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보 처리 기술의 발전은 그것들을 아주 현실적 제도로 만들었다.

그런 정책들이 시급하게 요청되는 분야들 가운데 하나가 노인들의 복지다.

'사오정', '오륙도', 그리고 '삼팔선'과 같은 자학적 뜻이 담긴 말들이 가리키듯, 이제 우리 사회엔 조기 퇴직 시대가 찾아왔다.

수명의 연장과 겹쳐서, 이것은 노인들이 뚜렷한 경상 소득이 없이 오랫동안 살아야 함을 뜻한다.

이런 상황이 갑자기 닥쳤으므로, 시원스러운 대책이 있을 리 없고 재원도 부족하다.

거의 모든 정책들은 세금을 더 걷어야 실행할 수 있다.

그리고 이미 현 정권은 복지 부문의 예산을 크게 늘렸으므로, 돈이 많이 드는 정책들은 도입하기가 쉽지 않다.

다행히, 경제학자들이 노인들의 복지를 위해 고안한 제도들 가운데엔 세금을 더 걷지 않아도 실행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은 물가 상승에 대한 방어력을 지닌 저축 수단의 개발이다.

노년에 대비해서 저축하는 사람들은 모두 화폐 가치의 하락을 두려워하고, 실제로 화폐 가치의 하락은 연금 생활자들을 궁핍으로 몬다.

이자와 원금을 물가의 변동에 맞춰 지불하는 '물가 연계 채권(indexed bond)'의 발행은 그래서 노년층에게 큰 도움이 되는 제도다.

그리고 그것은 세금을 더 걷지 않아도 실행할 수 있다.

노년층에게 보다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은 '주택 할부 매도제'의 도입이다.

노인들 가운데엔 값이 상당히 나가는 집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만, 그들이 그 집을 생전에 처분하기는 어렵다

집을 줄여가며 생활비를 마련하는 일도 무척 번거롭고 비용이 많이 든다.

따라서 그들이 자기 집에 그대로 살면서 그 집에 대한 소유권을 조금씩 팔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좋은 방안이다.

금융 기관들이 소유권을 할부로 매입하면 되므로, 세금을 더 걷을 필요도 없다.

미국의 경우, 노인들이 소유한 집들의 가치는 7천억 달러나 되며, 이 제도의 도입이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선 집값이 상대적으로 비싸고 조기 퇴직자들의 저축은 대부분 집에 잠겼다.

자연히, 그렇게 집에 잠긴 저축에 유동성을 부여하는 '주택 할부 매도제'의 도입은 노인들의 복지에 큰 도움이 되고 사회의 짐을 크게 덜어줄 터이다.

근년에 민중주의에 기운 정권들이 잇따라 들어서면서, 우리 사회의 구성 원리에 어긋나거나 비효율적인 정책들이 많이 도입되었다.

사회과학의 발전에서 얻어진 통찰에 바탕을 두고 정교하게 설계된 정책들을 마련하는 일은 우리 사회의 효율을 높이고 시민들의 복지를 늘릴 것이다.

총선이 다가오는 지금, 우리 정당들은 그저 정부 지출을 늘리겠다는 약속만을 내놓을 것이 아니라 참신한 정책들을 설계해서 공약으로 내놓아야 할 것이다.

복거일(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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