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경주와 문화엑스포

경주는 볼수록 운치가 있다.

여러 산들이 둘러쳐진 넉넉한 공간에 신라 천년의 갖가지 유물들이 서늘한 바람과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즈음 만추의 풍경도 깊은 맛이 있다.

소리로 말하기 보다 고즈넉히 뜻으로 전해지는 곳이 아닌가 한다.

그런 경주에서 열리는 세계문화엑스포는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행사장이 보문단지 부근에 자리잡아 보문단지의 조용하고 쾌적한 분위기를 손상하는 것 부터가 그렇다.

관광객들이 신라 관광을 마치고 조용하게 쉬어 가도록 잘 가꾸어진 곳이 보문단지인데 그 한 켠에 관광객들을 피곤하게 할 수도 있는 혼잡함을 가져다 놓은 셈이다.

평일인데도 입구서부터 붐비는 관람 인파, 화려한 색깔들로 치장한 시설물과 주변 주차장에 도열한 수많은 관광버스들도 왠지 경주의 색깔과는 달라보였다.

지난 8월13일 개막해서 10월23일 폐막 예정 관람객은 100만명을 돌파했다고 한다.

그런데 관람객들은 대부분 단체로 들어온 학생들이었다.

행사장은 왁자지껄 소음과 먼지를 일으키며 종횡으로 누비는 아이들의 천국이었다.

놀이기구가 있고 먹을거리가 있고 흥미를 끄는 프로그램도 있으니 아이들은 모처럼의 나들이가 신바람 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도록 마련한 행사장이라면 단체 관람객에 대한 예약과 조정으로 문화적 관람 질서가 유지되도록 해야하는데 그런 노력은 없고 관람객 숫자늘리기가 우선인 듯했다.

아마도 어린이날 놀이공원 같다고 생각한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또 수많은 식당과 매점을 보면서 야시장을 연상한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엑스포란게 기본적으로 이것 저것 백화점식으로 펴놓고 요란스럽게 손님끌기를 해야 하는 행사여서 이해를 못할 바도 아니지만 장터 약장수같은 흥행 위주 이벤트는 경주의 역사적인 분위기에 젖은, 젖고 싶어하는 관광객을 당혹하게 할 뿐이다.

관람객 100만명 돌파가 곧 엑스포의 성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관광객들이 불국사나 첨성대 관광 일정 대신 엑스포장을 찾았다면, 매력적인 홍보에 이끌려 경주에 와서 엑스포만 보고 유적은 쳐다보지도 않고 떠났다면, 경주와 신라를 위해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경주에서 신라를 버리고 세계 놀이문화에 몰입한다면 경주와 신라는 활로가 없다.

광범위 해서 막연하기까지 한 문화라는 주제를 달고 국내외의 잡다한 공연과 볼거리를 늘어놓는 과정에서 신라문화가 들러리 역할만 하다가 러시아 볼쇼이서커스나 중국 기예류의 공연문화에 희석되고 훼손 당할 소지는 없는지 관광객의 시각에서 냉정하게 평가해봐야 할 일이다.

혹시나 경주를 찾는 관광객들이 신라만으론 재미없어 하기 때문에 별도의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진행하는 행사라면 그만 두는게 옳다.

경주는 신라 그 자체로 수학여행단 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의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오는 볼거리가 돼야 하는 것이다.

천년의 역사가 천년을 지나서도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은 가슴 섬짓한 감동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장점을 못살리고 엉뚱한 곳에서 활로를 찾는다면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비용을 들인다면 신라의 문화유산을 더욱 알뜰하게 가꾸고 홍보하는 일에 쓰는 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예를 들자면 좁은 울타리에 갇혀 신음하는 천마총이나 대릉 등 각종 문화재들의 영역을 넓게 확장해서 신라를 살아 숨쉬게 하는 일이나 문화재 관람료보다 비싼 주차료를 대폭 내리는 일 등이 그런 것들이다.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자치단체마다 온갖 축제를 벌이고 있지만 안동탈춤축제, 청도소싸움 등이 그나마 성공 사례에 속한다.

이들 성공한 행사의 공통점은 지역의 자산과 특성을 잘 살린 데 있다.

세계문화엑스포는 경북도가 주관하는 큰 행사다.

장장 70여일에 걸쳐 다양한 문화사업을 펼쳐 내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노력과 투자만큼 경주에 유익했느냐, 또는 지역 문화산업 진흥에 도움이 됐느냐 아니면 신라문화의 세계화에 성과가 있었느냐 하는 문제는 별개로 따져봐야 한다.

외화내빈은 아닌지. 많은 예산을 들여 무엇을 얻고 있는지.

이번 엑스포에서 4D 입체영상으로 만든 신라 이야기 단편 '화랑영웅 기파랑전'이 인기라고 한다.

세계문화도 좋지만 경주에선 신라의 것이 중요하다.

세계문화엑스포를 신라를 주제로 통합한 신라문화엑스포로 전환하는 것은 어떨까. '기파랑전'처럼 유적유물만으로 느끼기 어려운 부분들을 설명해주고 세계인을 경주로 부르는 흥미로운 신라마당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해외공연문화가 필요하다면 시의에 맞춰 한편씩 부르면 될 것이다.

작게 여겨지지만 신라 천년은 결코 작지 않다.

천년은 아무렇게나 흘러가는 세월이 아니기 아니기 때문이다.

경박한 구경거리때문에 천년의 무게가 하찮게 여겨져서는 안된다.

김재열〈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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