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 에세이-시간의 선물

오래된 나무 아래 서 있으면 기도하고 싶어진다.

낙엽 떨어지는 소리에도 겸허해진다.

햇살을 받으며 사람들은 고개를 숙인 채 걸어간다.

어제 올려다보았던 나뭇잎이 오늘 아침에는 땅위에 뒹굴고, 잎새들을 떨군 나무들은 성자 같은 모습으로 팔을 벌리고 서 있다.

늙으신 아버지를 바라보는 것처럼 왜 이렇게 마음이 아려오는지, 속절없는 낙엽들을 보면 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지 모르겠다.

한 두 해도 아니고, 사십 년 넘게 오갔던 가을인데....

언젠가 낮잠 주무시는 아버지의 손등을 무심코 만져본 적이 있다.

나무껍질처럼 단단하고 질긴 살갗에 불거진 굵은 힘줄. 어쩌면 고집스럽기도 하고, 세월을 향한 무언의 항변을 하며 자신의 삶을 동여매고 있는 동아줄 같기도 했다.

아니, 우리 자식들을 지켜준 울타리였으리라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했다.

그 손등이 아름답다는 생각도 들었다.

청춘 시절을 건너오지 않은 백발이 없고, 껍데기 속에서 나오지 않은 알맹이가 없지 않은가.

아름다운 소멸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 응집과 팽창의 시간을 지나 당신의 열매들인 자식들 다 떠나보내고, 초연하게 세상을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쭈글쭈글한 손등에는 세상을 온몸으로 껴안고 살아온 길들이 겹겹이 쌓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잠꼬대처럼 희미하게 들리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괜찮다, 나는 괜찮다' 고 하시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때 만진 것은 또 다른 껍데기로 살아갈 모든 알맹이, 나 자신의 흔적인지도 모르리라. 나도 저렇게 아름다운 껍데기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하니 문득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저 껍데기는 소용없다'고 누가 말한다 해도 나는 생각이 다르다.

마당가에 수북이 쌓여 있는 딱딱한 콩깍지는 태워서 재가 될 쓰레기이기 이전에 아득한 생명의 집이었다.

푸르게 껴안고 있던 그 여리디 여린 열매들을 비바람에도 흩어지지 않게 소중하게 보듬고 햇살 담아 키우다가, 때가 되면 스스로 말라버리는 그 집은 마음을 비울 줄 안다.

제 몸 찢어 껍데기를 여는 그 순간 알맹이들은 한껏 탱탱하게 여문 '알콩'으로 세상을 향해 멀리 날아가게 마련이다.

그때 껍데기가 생각하는 것은 푸른 생명이 담겨 있던 그 자리에 투명한 햇살이 통과할 때까지 모든 것을 비우고 온전히 내어주는 일이 아니었을까.

'조용하지만 결코 휴식을 취하지 않는, 시간이라 불리는 사물. 굴러가고 돌진하고, 신속하고 조용하게 모든 것을 포용하는 대양의 조류 같은.... 이것은 말 그대로 영원한 기적이다'. 토마스 칼라일의 말처럼 이 땅의 지난 시간들은 기적처럼 흘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봄 나무에 꽃이 피기도 전에 다시 기억하기조차 싫은 참사들로 가슴 아팠고, 비장한 마음 다잡아 젖 먹은 힘까지 짜내어 대구U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러냈던 우리 대구. 가을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이름만 들어도 화가 나는 태풍 '매미'가 또 할퀴고 간, 참으로 기막히는, 그래서 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 도시에도 시간의 특별한 선물, 가을이 왔다.

모두가 어렵다고 한다.

정치는 정치대로 좌충우돌 방향도 없이 흘러가고, 경제는 서민들의 편에서 멀어지면서 얄팍한 카드 한 장의 위력으로 사람의 목숨까지 저버리게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개인의 가치가 사라지니 가정이 흔들리게 되고, 사회마저 불안해지는 이즈음 오페라 하우스나 전시장, 음악회가 있는 곳에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한 장의 그림 또는 시 한 편으로라도 삶의 질을 생각하고 마음을 비우는 여유를 가진다면 이 어려운 시대도 견디고 극복해 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기지 않을까. 가끔은 가을 나무 아래 서보자. 가슴 뭉클해지며 산다는 게 숙연해질 때 오히려 '부드러움의 힘'이 솟아날는지도 모를 일이다.

소멸의 아름다움을 가르쳐주는 시간의 선물, 가을은 깊어가고 있다.

강문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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