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대표적 좌파지식인 레지스 드브레(R´egis Debray)가 최근작 '곡예사의 명예'에서 지적하는 바와 같이 지식인들은 전쟁이나 역사변동에 직면하여 지적인 외줄타기를 하는 곡예사가 된다.
사안의 성격과 정치.사회적 모순의 변화에 따라 좌로 혹은 우로 흔들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곡예사가 아무리 좌우로 흔들리더라도 보다 나은 세상으로 이어지는 줄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을 때만 그의 명예는 지켜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곡예사의 명예를 지켜주는 줄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이념과 문화의 차이에 따라 그 무엇을 더하고 빼더라도 인본주의와 인권은 결코 제외할 수 없는 핵심요소이다.
세계대전이라는 인류 대 참사를 두 차례나 겪고, 이념적 스펙트럼이 넓게 형성되어 있는 유럽 지성사에서 이 가치들은 항상 근간이 되어 왔다.
그래서 중요한 정치.사회적 현안이 있을 때마다 풍부한 토론이 가능하고, 그 토론은 불가역적 논쟁으로 비화되기보다 다양성이 보장되는 통합으로 귀결되고 있다.
현재 북한의 인권문제가 국제적 현안으로 부각되어 있다.
탈북자문제가 서방언론에 크게 부각되어 있고, 지난 4월 16일에는 제네바 소재 유엔인권위원회에서 대 북한 인권개선 촉구 결의안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이 결의에 따라 유엔인권위는 금년 1년간 북한의 인권상황에 대해 5개 주제별로 감시하고, 북한당국에 개선을 촉구한 뒤에 명년 봄에 있을 제60차 회의에서 다시 논의할 것이다.
따라서 금년 1년은 북한의 인권문제에 관한한 아주 중요한 분기점이 될 수 있는 해이다.
이 결의안이 채택되도록 현지에서 '로비'를 한 필자로서는 한국사회에서도 바람직한 여론과 정책이 형성되도록 그간 동분서주해 왔다.
그 과정에서 정부 산하의 한 인권담당기관에서 주최한 2차례의 토론회에 참석하여 다음과 같은 견해들을 들으면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북한에서의 영아살해와 남한에서의 낙태가 무엇이 다른가?" "북한에서의 공개처형과 미국에서의 전기의자 사용은 단지 문화의 차이다". "북한의 인권문제를 논하기 전에 북한의 생존권을 보장해 주어야 되고, 북한의 현 경제상황은 미국의 경제봉쇄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우리사회의 최고 엘리트들을 배출하는 명문대학 출신들이고, 언론매체의 단골 등장인물로 우리사회의 여론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식인들이라는 사실이다.
이들의 주장을 서구 지식인 사회에 소개한다면 좌파.우파를 떠나 아연실색할 것이다.
먹을 것이 없어서 중국으로 탈출했다가 잡혀서 돌아온 임신여성들의 태중아이를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며 강제낙태 혹은 유도분만 후 살해하는 사회, 정치적 이유로 공개처형을 자행하는 사회를 비호하는 우리사회의 그 지식인들도 진정으로 본인과 자신의 가족이 그런 사회에 살기를 바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가치에 따른 객관적 판단은 도외시하고 북한의 현 실태를 비호하는 것은 보다 나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 좌우로 비틀거리는 곡예사의 몸짓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헛된 욕심으로 허상을 쫓아 구경꾼은 물론 자신까지도 속이는 짓이다.
유엔경제사회이사회는 11월 10일부터 28일 사이에 북한이 작년 4월에 제출한 경제적.사회적.문화적 인권에 관한 보고서를 심의할 것이다.
12월 초에는 유럽연합이, 앞에 언급한 대북인권결의의 발기(發起) 주체로서 모종의 후속조치들을 논의.결정할 것이다.
그런데 한국 내에서는 여기에 부응하는 움직임이 극히 미미하다.
북한 비호세력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북한을 무조건 도와 경제상황이 개선되면 인권상황이 개선될 것으로 낙관할 수 없는 것은 중국과 베트남의 정치범수용소 존폐 여부가 잘 말해준다.
두 나라 모두 개혁.개방정책을 취하면서 경제상황이 개선되었지만 베트남에서는 '개조학습장'이 폐쇄된데 비해 중국에서는 '라오가이(勞改)'가 여전히 존속되고 있다.
북한이 보다 나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고, 통일 후 신속히 사회적 통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북한의 현 실태를 정당화 하고 김정일 정권을 비호하기보다 북한의 인권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해야 될 것이다.
허만호(경북대 교수.정치외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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