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양행의 창업자인 유일한(柳一韓). 그는 근세 100여 년 한국 기업사에서 친일(親日)과 정경유착에 연루되지 않은 보기 드문 경제인이다.
아버지의 신문명에 대한 각성으로 9살 때 미국으로 보내졌으며, 이승만.서재필 등이 주도하는 해외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1926년 일제 치하의 고국으로 돌아와 기업활동을 하며 애국계몽운동에 헌신했다.
기업인으로서 그에게는 세 가지 철학이 있었다.
기업은 나라와 민족의 것이며, 신용을 지켜야 하며, 정치와 유착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철학을 지키기 위해 상공장관을 거절했고, 그 바람에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탈세 조사를 받는 어려움도 겪었다.
▲미국 체재시절, 그는 '라초이 식품'을 열었다.
미국 전역을 돌며 구한 녹두로 숙주나물을 재배, 업체에 대주는 일이었다.
그런 어느 날 트럭 배달을 하다 교통사고를 냈다.
신용위기를 불러올 수 있는 사건이었다.
현장에 달려온 신문기자가 숙주나물을 병에 넣어 배달하는 이유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유일한은 "보관성이 약한 숙주나물의 신선도를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병 포장을 했다"고 대답했다.
이 사건은 전화위복이 됐다.
'교통사고'가 아닌 '유리병 숙주나물' 기사가 보도됐기 때문이다.
주문이 배로 늘었다고 한다.
▲홍보 기법의 하나로 '뉴스가 뉴스를 덮는다'는 경구가 있다.
언론은 항상 새로운 뉴스를 좇는 속성이 있다.
정부나 기업은 큰 문제가 야기되면 새로운 뉴스를 만들어 위기상황을 탈피하려 든다.
노무현 대통령이 승부수로 들고 나온 재신임 국민투표는 '뉴스가 뉴스를 덮는다'의 전형이다.
'나쁜 일은 언론이 밝히기 전에 먼저 털어놓는다'는 홍보 기법까지 보태졌다.
국민들의 국정불신과 미확인 상태의 SK비리 연루를 재신임이라는 더 큰 뉴스로 입막음해 놓은 것이다.
대통령의 비리 연루가 밝혀지더라도 그 충격은 상당히 줄어들 것이다
홍보술로 권좌를 따낸 능숙함이 엿보인다.
▲1971년 작고한 유일한은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
그의 딸 유재라도 250억원 전 재산을 유한재단에 기증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진실이 바탕 되어야 세상을 향한 목소리는 빛을 발하는 법이다.
문제를 덮기 위한 새로운 뉴스가 진실과 진심에 반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홍보라 할 수 없다.
재신임의 승부수를 띄운 노 대통령에게 유일한의 경영철학을 대입시키면 이런 말이 된다.
"정치는 나라와 민족의 것이며, 대통령의 말은 신용이 있어야 하며, 비리와 유착돼서는 안 된다". 노 대통령이 가진 거만(巨萬)의 정치적 전 재산을 나라에 환원할 마음의 준비가 없다면 재신임 결단은 한 때의 선전활동에 불과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박진용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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