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오전 8시. 대구공업대학 중앙도서관.
찬 공기를 가르며 한 청년이 정문을 지나 열람실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2001년 2월 경북대학교 통계학과를 졸업한 민모(28. 대구 구암동)씨. 민씨는 2년 8개월째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6월부터 2개월 정도 대구의 잡지사에서 일한 것이 경력이라면 유일한 경력. 그 잡지사는 창간호도 못내고 문을 닫았다.
그는 도서관에 앉자마자 최신시사상식 책을 펼쳤다.
오전 10시. 책상에만 앉아있는게 답답했는지 도서관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웠다.
같은 신세인 그의 대학동기들도 함께 나와 담배불을 서로 붙여주며 하늘을 쳐다보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청년실업'이 자신들만이 아닌, 이 시대 이 땅에 사는 상당수의 대학졸업생과 졸업예정자들이 겪는 고통과 두려움이라지만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탄만 하기에는 '자신이 한심하다'며 다시 들어가 영어책을 펼쳤다.
영어실력은 현업에서 크게 쓰이지 않는 분야에서도 취업하려면 반드시 갖춰야할 전제조건이다.
때문에 영어공부만큼은 하루도 빼먹을 수 없다.
30분가량 이어폰을 귀에 꼽고 듣기문제를 푼뒤 1시간은 독해공부를 했다.
눈을 빠르게 돌리며 독해문제 답을 연필로 표시하고 답을 맞춰본다.
틀린게 왜그리 많은지 연신 대각선으로 줄을 그어댄다.
그리곤 다시 한숨.
낮 12시. 그는 2000원을 들고 구내식당으로 향한다.
오늘 메뉴는 정식.
단돈 1천600원에 점심을 해결했다.
나머지 400원은 자판기 커피값이다.
친구들이 보이지 않자 그는 한손에 커피, 한손에는 빨갛게 타들어가는 담배 한 개비를 들고 서서 이리저리 돌아보기도 하고, 벤치에 앉아 사색에 잠긴다.
마치 세상 고민을 혼자 다하듯.
점심을 해결하고, 커피 한잔에 담배 한개비. 다음 코스는 낮잠이었다.
민씨는 잔디밭에 털썩 누워 두 팔을 베개삼아 30분가량 세상 모르고 잠들었다
그는 '낮잠잘 때가 하루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 말했다.
오후 1시 30분. 민씨는 순찰돌듯 캠퍼스를 한바퀴 두르고 게시판 앞으로 가 혹시라도 새로운 곳에서 채용공고가 나지 않았나 이곳저곳을 꼼꼼히 살핀다.
그러나 오늘도 적당한 곳이 없었던지 고개를 떨군채 컴퓨터실로 발길을 돌린다.
그는 앉자마자 인터넷에 접속해 열심히 취업사이트를 둘러본다.
익숙한 듯 이곳저곳을 클릭하며 필요한 몇군데는 메모를 해두고 전화번호도 빠뜨리지 않고 적어둔다.
그가 주로 이용하는 취업사이트는 워크넷(www.work.go.kr), 잡코리아(www.jobkorea.co.kr), 인크루트(www.incruit.com)와 학교 취업사이트(knujob.knu.ac.kr)다.
그러나 대부분 경력직 모집이라 '도전해 볼만한 곳이 하루에 한군데라도 걸리면 다행'이라고 한다.
그는 미리 써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지원하는 회사에 맞게끔 고쳐서 서류봉투에 정성스레 넣어둔다.
그리고는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면접만 볼 수 있다면 …'. 민씨가 청년실업자로 있는 동안 입사원서를 쓴 것만 150여곳, 면접을 본 곳은 30여곳. 그러나 그를 최종합격시켜준 기업은 한 군데도 없었다.
오후 4시. 민씨는 답답한듯 도서관을 빠져나와 게임방으로 향했다.
'하루의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유일한 곳'이 게임방이라고 말하는 그는 인터넷 고스톱과 스타크래프트 게임을 즐기면서 모든 것을 잊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의 옆에는 같은 처지에 놓인 청년실업자 친구들이 같이 담배를 피워대며 한마디씩 말을 주고받았다.
2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그는 주인에게 2천원을 건네주고 두 친구와 함께 터벅터벅 지하계단을 올라 밖으로 나온다.
그는 "게임에 열중할 때는 세상의 무게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오후 6시. 이제는 저녁거리가 걱정이다.
비싸지 않으면서 배를 채울 수 있는 음식을 찾아야했다.
그가 선택한 것은 학교앞 분식점의 된장찌개. 기자는 민씨와 함께 된장찌개를 먹으며 그의 안타까운 현실에 대한 사연을 좀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부모님의 눈치를 보는 것이 이제 한계에 다다른 듯했다.
"한달에 20만원도 쓰지 않는데 그 돈조차 부모님에게 타서 쓰다보니 뵐 낯이 없다"고 말했다.
실업자 생활이 시작된 이후 여자친구를 사귀는 것조차 그에게는 사치였다.
"마음에 드는 여성이 나타나도 직업도 없이 어떻게 용기있게 다가서겠느냐"고 말했다.
이어 그는 "학교 후배들이 보고 싶어도 밥이나 술 사줄 돈이 없어 연락도 못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그동안 있었던 서러운 일들을 다 털어놓을 태세였다.
명절에 친척들이 '아직도 놀고 있나'라고 한마디씩 던질 때 느끼는 자괴감, 남들 다 가는 휴가철에 여행계획조차 세우지 못하는 신세, 심지어는 온 국민이 축제에 들떴던 월드컵때도 혼자서 TV앞에 앉아 축구경기를 봐야했던 기억 등 청년실업자라는 이유만으로 받았던 심적고통은 직접 당하지 않고는 쉽게 이해하기 힘들 것 같았다.
그렇게 얘기를 듣다보니 어느덧 9시였다.
밤 9시. 그는 다시 도서관으로 올라가 신문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혹시 신문에 구직광고가 없을까해서 였다.
조.석간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기업 채용공고나 구인광고란을 집중적으로 살폈다.
그러나 원서를 쓸만한 곳이 없었던지 다시 본인의 열람석으로 돌아가 책을 든다.
너도 나도 취업의 좁은 문을 열려는 안간힘에 밤 늦은 시간이지만 열람석에는 빈 자리가 없다.
올 하반기에 대기업들이 채용규모를 지난해보다 축소할 것이라는 언론 보도가 가슴을 옥죈다.
한해 대학졸업자가 24만명이나 되는데 기업의 최대 채용인원은 10만명. 게다가 자신과 같은 지방대 출신은 취업 문이 더욱 좁은 것이 현실이다.
머리가 복잡했는지 그는 최근 서점가 베스트셀러 중 한권인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흥미로운 제목의 책을 읽고 있었다.
그는 한참동안 책장을 넘기더니 갑자기 책가방을 챙기고 '집으로 가야겠다'고 말했다.
그가 도서관을 빠져나온 시간은 밤 10시30분. 가로등 밑에서 터벅터벅 걷는 그의 발걸음이 왜그리 무겁게 느껴지는지 기자는 '오늘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말조차 떨어지지 않았다.
권성훈기자 cdrom@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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