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매미가 할퀴고 지나간 봉화군 소천면 남회룡리 솔안마을. 마을 전체를 휩쓴 산사태로 일가족 3명이 참변을 당한 이 곳에 가을이 찾아왔다. 그러나 처절했던 여름의 흔적만 어지러울 뿐 가을의 여유는 없다. 마을이 있던 자리는 사람들 기억에만 남아있다. 흔적조차 더듬기 쉽잖다.
"절기가 바뀌어 날씨 추워지는거야 당연하지만 가을이 됐는데도 아무 할 일이 없는게 기막혀. 집이며 땅 모두 잃은 영감이 갈피를 못잡고 내내 술만 마셔서 큰 걱정이여".
해가 서쪽으로 뉘엇뉘엇 저물 무렵 솔안마을 김영달(74).이덕녀(68) 노부부를 찾아갔다. 산사태로 평생 살던 집을 잃은지 한달째. 바람막이도 시원찮을 2평짜리 비닐 움막 앞에서 노부부는 수심 가득한 얼굴로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속앓이를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이다. 할머니는 폐허더미에서 찾아낸 양은솥을 닦고 또 닦았다. 더 닦을 것도 없을 성 싶은데 연신 문질러댔다.
"이웃사람 모두 찾아와서 잔치를 벌여도 넉넉할 만큼 큼지막한 집이었는데…". 흉물처럼 쌓여있는 집 잔해를 가르키며 말꼬리를 흐리던 할머니는 기어이 눈시울을 붉혔다.
하늘이 저지른 일, 어디 원망할데나 있으면 좋으련만. "자고나면 가슴이 벌렁벌렁 뛰어 못살겠어. 평생 죄지은 것도 없는데 불안해 죽겠구먼. 온통 가슴이 텅 비었다니까".
맨땅에 야외용 비닐돗자리 한 장만 달랑 깐 움막은 해 저물기 무섭게 한기가 스며들었다. 하루 저녁에 소주 반병은 마셔야 겨우 추위를 견딘다며 쓴 웃음을 지은 김 할아버지는 백열등 열기도 아쉬워 밤새도록 전등을 끄지 못한다고 했다. 전기장판 한 장이 절실한 형편이었다.
밝은 낮은 그럭저럭 지낼 수 있지만 밤만 되면 무섭다. 뼛속까지 스미는 한기를 참고 잠이라도 살포시 들라치면 어김없이 악몽이 찾아든다. 그저 날 밝기를 기다릴 뿐이다. 동녘에 희뿌연 기운만 보이면 움막을 나와 물을 끓인다. 딱히 어디에 쓰려는 건 아니다. 할일을 만들 뿐이다.
"우리는 목숨이라도 건졌잖어. 이웃 주환이네는 아직도 산사태에 쓸려간 아버지를 못찾았어. 파묻혔는지, 안동댐까지 떠내려갔는지. 며느리와 애들 마음이 어떻겠어".
폐허로 변한 뒤 이웃조차 모두 떠난 마을. 이재민 긴급구호로 받은 쌀과 라면으로 끼니를 떼우고, 비닐움막에 사는 기막힌 처지인데도 노부부는 이웃 걱정이 앞섰다.
"보상이 나오기는 한다는데. 조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나라 일이 그리 쉽게 되나. 겨울 전에 대충 집이라도 지어야 살텐데". 보상금 몇 푼 손에 쥐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노부부는 하루가 다르게 추워지는 요즘 온통 겨울나기 걱정으로 지샌다. 악이 받치고, 부화가 치밀 법도 한데 누구 하나 원망하지 않는다. 돌아서는 기자에게 노부부가 마지막 당부를 했다. 보상금이나 전기장판 얘기가 아니었다. 지금도 귓전에 맴도는 말은 "주환이 아버지 좀 빨리 찾게 도와줘요", 그 한마디였다. 봉화.권동순기자 pinoky@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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