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1년 3월, 봄볕이 따스했다.
산들바람에 실린 산새들의 지저귐이 울려 퍼졌다.
기암절벽과 소나무숲 아래, 강물이 가로로 흘렀다.
남한강이 '용섬'에 부딪히는 곳이었다.
왼쪽 저 멀리 달천이 남한강에 와 닿았다.
충북 충주시 칠금동 탄금대(彈琴臺).
1천452년 전, 이 곳에는 새 울음소리가 가야금을 타고 화음을 이뤘다.
현을 희롱하는 이문(泥文)의 눈에는 상념에 잠긴 스승, 우륵(于勒)의 표정이 심상찮았다.
몇 해전 기억을 영 지우지 못하는 듯했다.
고향(성열현)을 떠나 국읍(고령)에 터를 잡았지만, 급기야 나라를 옮겨 충주까지 온 데다 왕을 두 번이나 바꿔 모셔야 하는 그 심정이야….
갑자기, 신라 왕실의 한 신하가 '진흥왕이 충주 낭성(娘城)에 행차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우륵은 제자 이문을 데리고 왕을 맞았다.
우륵은 '12곡'을 튕겼고, 왕과 신하들은 청정한 '자연의 소리'에 흠뻑 젖어들었다.
이듬해, 왕명을 받은 우륵은 계고에게 가야금 연주를, 법지에게 노래를, 만덕에게 춤을 가르쳤다.
춤과 노래와 연주가 어우러진 신라의 음악, 아니 대가야의 음악이 빛을 보는 시점이었다.
'탄금대 시퍼런 물 질펀하게 흐르는데/천고의 물결 속에 지난 일은 잠겼는가/강물은 바위를 돌아 흐느끼는데/돌에 부딪히는 물소리 으스스하기만 하고/…' 지금도 탄금정을 맴도는 글귀는 천년을 거슬러 우륵의 가야금 소리에 빨려드는 듯했다.
500년 무렵, 경북 고령군 고령읍 쾌빈리. 고향인 성열현(경남 의령군 부림면 추정)에 있던 우륵은 가실왕의 부름을 받아 이곳 대가야의 국읍으로 터전을 옮겼다.
대가야의 왕이 지방에 있던 그를 도읍지로 스카우트 한 것이었다.
그는 이 마을 뒷산에서 대가야의 악기와 음악을 만드는데 매달렸다.
중국의 '쟁(箏)'도, 삼한(마한)시대 광주 신창동의 '10줄 현악기'도 아닌 고유의 악기를 만들어야만 했다.
자연의 소리를 내기 위해선 좋은 악기 판과 줄의 재료가 필요했다.
물가에 자란 신령한 오동나무와 질좋은 명주실을 구하기 위해 조양(朝陽;경남 합천군 야로면 추정)으로, 부상(扶桑;경북 금릉군 남면 추정)으로 쫓아 다녔다.
수많은 실패를 거듭한 끝에 오동나무(앞뒤 판), 명주실(12줄), 돌베나무(안족) 등 순수한 자연의 재료만으로 자연의 소리를 재현해냈다.
1년 열두 달을 상징해 12줄을 만들었고, 해와 땅을 나타내기 위해 가야금의 앞판은 둥글게, 뒤판은 평평하게 했다.
머리 부분은 양의 귀 모양(羊耳)을 냈다.
12곡도 완성했다.
대가야의 영향력이 미치던 지방과 소국의 지명을 본떠 이들 세력을 규합하고 지배체제를 더욱 확고히 하려던 가실왕의 뜻이 반영된 곡이었다.
가야금의 탄생. 그 악기에서 나온 소리는 산속에 부딪혀 마을로 흘러들었고, '정정한' 소리는 대가야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지금까지 이 곳은 '정정골'로 불린다.
우륵 기념탑과 영정을 모신 곳이다.
2003년 가을, 충북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 우륵의 손길을 재현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난계국악기제작촌'의 조준석(43)씨. 1천500여년 전 정정한 소리가 그의 손을 거쳐 다시 흘렀다.
조씨의 가야금 제작작업은 77년부터 26년 동안 계속되고 있다.
조씨는 "자연 그대로의 소리를 내기 위해선 재료구입부터 신중해야 한다"며 "쉽게 갈라지지 않고 소리가 맑은 오동나무를 경북과 전남지역에서 직접 베 제재한 뒤 5년 동안 자연 건조시킨다"고 했다.
실크 원사를 합사한 명주실, 벚나무나 돌베나무로 만든 기러기발(雁足), 면사를 꼰 부들, 돌베나무 원판, 박달나무 돌궤 등 자연 재료 하나하나에 정성을 담았다.
조씨는 가야금 탄생 이전, 삼한시대 10줄 현악기(광주 신창동 출토)도 재현했다.
또 가야금의 '세계화'에도 정열을 쏟고 있다.
지난 4일부터 5일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야금을 전시했고, 지난해 8월엔 일본 기네마현에서도 초청 전시회를 가졌다.
특히 최근에는 줄 수를 늘려 7음계를 내는 개량 가야금 제작이 완성단계여서 향후 가야금을 통한 서양음악 연주도 가능할 전망이다.
조씨뿐 아니라 조씨의 작은 아버지와 세 형 등 4명도 전주, 서울, 수원, 청주에서 각각 가야금 제작에 심취해 있다.
조씨의 딸(16)과 아들(14)도 광주에서 각각 가야금 연주와 제작기법을 배우는데 몰두하고 있다.
대가야 가실왕과 우륵이 흐뭇해할 풍경이었다.
성열현 사람, 우륵은 500년대 초반 가실왕에 의해 고령 정정골로 스카우트돼 가야금과 우륵12곡을 완성했고, 대가야 멸망을 앞둔 500년대 중반 신라로 망명했다.
이후 신라 진흥왕의 배려로 한반도의 중원인 충주 탄금대에서 가야금을 뜯고, 제자들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던 것. 우륵의 가야금은 신라에 전파돼 임신한 여성이 가야금을 연주하는 500년대 '흙 인물상(土偶)'(경주 황남동 출토)과 가야금을 장식한 토기조각 등도 다수 나왔다.
대가야의 가야금은 고령, 경주, 충주를 거쳐 이젠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다.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김인탁(고령)기자 kit@imaeil.com
사진.안상호기자 shahn@imaeil.com
사진:'난계국악기제작촌'에서 완성된 가야금의 음색을 조율하고 있는 조준석(43)씨와 직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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