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을까? 빈 자리가 누군가 떠나간 쓸쓸함과 무엇인가 빠져나간 공허만 잠시 머물, 슬픔의 영역이라고만 생각한 것은. 지금 비어있는 이 자리는 누구든 다가와 앉을 수 있고 무엇이든 얼마든지 들여놓을 수 있는, 새 기쁨의 빛나는 영토임을 지금껏 알지 못했다.
더구나 마음 자리 조금만 비워내면 이 세상 온갖 찬란한 것도 다 내 것으로 가질 수 있을 것을….
베란다에 나서면 금오산 정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푸르게 누워 있는 와불상의 단정한 이마며 콧날 부드러운 입술까지 뚜렷한 얼굴선이 커튼만 조금 올리면 침실로도 거침없이 들어온다.
금오산을 온전히 내 것으로 가진들 이렇게 느긋하고 행복하게 바라볼 수 있을까. 비에 씻긴 아침산이 성큼 다가오는 봄날엔 계획된 외출도 미루고 그를 불러 차를 마신다.
그런 날은 찻물에도 더 짙은 초록물이 스며든다.
여름이면 맨얼굴로 고스란히 장대비를 다 맞고도 산은 변함없이 늠름하다.
비안개가 산허리를 휘감는 아침이면 저기 저어기 숨 꼴딱 넘어가는 소리로 한참은 더 자야할 남편을 깨우고 만다.
다가가 올라보면 은행나무며 단풍나무가 곱기도 하다.
그러나 이만치에서 바라보는 금오산은 가을이 와도 그 푸르름을 잃지 않는다.
하얗게 눈을 덮은 금오산을 바라볼 때 무슨 말이 필요하랴. 달려 올라가 실컷 뛰놀고 와서 다시 올려다 보아도 산은 그대로의 순백을 지키고 있다.
봄이 제법 이슥할 때까지도.
몇 년째 누려오는 이 호사스런 풍경화 속으로 며칠 전 불쑥 커다란 애드벌룬이 떠올랐다.
집 앞 야산이 깎여지고 그 자리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다는 것이다.
금오산이 온전히 내 것인들 이렇게도 허전하고 불안할까. 청소를 하다가도 빨래를 널다가도 눈 둘 곳을 잃고 당황하게 되었다.
지키지 못할 것에 미련을 두고 연연해하는 인간의 모습을 어제까지 내 것이던 바로 그 산이 측은한 듯 내려다본다.
지금껏 텅 비어있는 줄만 알았던 자리에 작지만 산이 있었다.
이제 그곳에 새로운 것이 들어옴으로 해서 봄이면 밀가루를 뒤집어쓴 듯 뽀얗게 올라오던 쑥이며, 만져질 듯 가깝게 들려오던 소쩍새의 울음소리도 잃게 되고 내 마음엔 그보다 더 큰 빈자리도 생긴다는 것이다.
밖으로부터 자유롭기. 누가 뭐라고 해도 내 마음은 나만이 움직일 것. 요즘 내가 얼마나 다스리고 싶은 내 마음인가. 금오산도 저기 가만히 있고 우리집도 여기 이대로 있고 머리카락 한 올 건드리는 사람도 없는데 내가 이렇게 안타깝고 무언가 커다란 것을 잃게 된 듯 쓸쓸한 것은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남들은 산이 거기 있어서 오른다지만 내가 본 산은 거기 있기에 허물어지는 것이기도 했다.
처음 이사올 때 이곳은 하루에 몇번 종점을 연장한 시내버스가 겨우 들어오던 변두리였다.
우리가 정원으로 들여놓을 수 없어서 병풍으로 구비구비 둘러놓았던 뒷산은 거짓말처럼 없어지고 학교가 생겨났다.
그 일은 내 눈앞에서 산이 사라지는 것을 실제 상황으로 생생히 보여주었는데 이제 또 하나의 산이 없어지게 된 것이다.
집들이를 하던 날부터 앞베란다에 걸어 놓은 금오산 풍경화를 자랑했었는데, 이제 베란다에는 키 큰 화분이라도 들여놓아야 하나, 이제 곧 누군가 다른 사람이 나처럼 저 산을 온전히 갖게 되겠지. 그 역시 산초록 배어나는 차를 마시며 저 산을 사랑하게 될까.
밖으로부터의 영향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기. 내가 어쩔 수 없을 바에야 자유롭게 수용하기. 풍선이 아니라 타워크레인이 몇 개씩 올라간들 어떠랴. 아니 하루 아침에 숨막히는 아파트 몇 개 동이 쑥쑥 들어선들 차를 타고 오 분만 벗어나면 어디서고 다시 만날 금오산. 그 산을 눈동자에 푸른 물이 들 때까지 얼마든지 바라볼 수 있고, 운동화 끈 고쳐 묶고 오를 수도 있다.
내 힘이 닿지 않는 거리에서 어떤 변화가 온다해도 조금씩 조금씩, 그러나 언젠가는 당당하게 받아들일 만큼 커지는 내 마음을 자랑하는 것은 또 어떠랴.
아무런 대가없이 지금껏 누려온 특혜에 오히려 감사하며 나보다 더 아름답게 저 산을 바라볼 누구인가 그를 위해 선뜻 빈 의자를 내미는 연습을 한다.
세상 가장 큰 기쁨의 찬란한 영토가 내 마음에 쑥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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