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북핵, 파병, 송두율씨 건 등으로 전쟁과 이데올로기가 얽혀져 혼돈스럽기만 하다.
무엇이 정당하고, 정당하지 않은가의 판단을 강요하는 시대로 내몰리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러나 전쟁과 분단은 이유가 어떠하든지 한 개인에게는 불행의 씨앗이 된다.
나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통해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평양사범학교를 나온 아버지는 해방 후 진주한 러시아 군 대령의 가정교사를 하게 되었다.
아마도 사회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은사님이 수업시간에 "왜 러시아 사람들이 우리 인민들이 애써 수확한 곡식들을 가져 가는가"라는 말 한 마디 때문에 공개 처형을 당하게 된다.
또 한번은 김일성 장군이 왔다고 해서 친구들과 그를 보러 갔는데 김일성 장군이 아니라 가짜 김일성이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평양의 어느 공원에서 비행기에서 투하되는 전단지를 주워서 보고 있었는데 어느 누구의 밀고로 기관의 출두령을 받았다
이윽고 아버지는 평양에서 조금 떨어진 고향의 재래식 화장실 아래 굴을 파고서 동생과 6개월간 은둔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인민군은 할머니 집으로 찾아가 아들이 어디에 있냐고 계속 추궁을 하였다.
하는 수 없이 동생은 "형은 장남이니 내가 인민군에 자원하겠다"고 하였다.
전쟁이 혼전의 양상을 치달으면서 중공군의 기습으로 평양은 다시 그들의 수중 아래로 들어가고 있었다.
다리에 관통상을 입은 동생은 죽음을 무릅쓰고 집으로 돌아오다 산속 중턱에서 도저히 걷지 못해 몸을 굴려서 집 앞마당에 도착하였다.
이를 보고 놀란 아버지는 적군인 동생을 업고서 치료를 위하여 요양소에 갔다.
그러나 중공군의 수중에 들어간 지역인지라 안전을 위하여 남한으로 홀로 피난을 가야만 했다.
지루한 피란의 행렬 끝에 마침내 대구에 정착하여 70평생을 살게 된다.
아버지는 이곳 이남에서 사는 동안 북에 두고 온 부모님과 형제를 잊지 못했다.
마침내 임종 며칠전 북의 여동생으로부터 한통의 편지가 왔다.
수년전 중국 동포에게 가족의 근황에 대하여 부탁하였던 것이다.
아버지는 동생 자신만이 유일하게 생존하고 있다는 메시지가 있는 세장의 편지를 읽고 또 읽고 한참을 반복하였다.
그리고 며칠 후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전쟁은 아버지에게 가혹한 희생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이 가을에 남에서 홀로 살다간 아버지와 많은 실향민들을 생각하니 또 다시 가슴이 미어진다.
전쟁은 없어야 한다.
이용환 경일대 교수.사진영상학부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탄핵안 줄기각'에 민주 "예상 못했다…인용 가능성 높게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