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대선에서 낙선, 정계를 떠났던 이회창 한나라당 전 총재가 30일 SK 비자금 100억원 유입에 따른 파문에 대해 대국민사과를 했다.
SK 돈 문제가 터진 지난 8일 이후 줄곧 침묵을 지켜온 이 전 총재는 22일 만에 말문을 열고 머리를 숙인 것이다.
그는 "비통한 심경으로 국민 여러분께 깊은 사죄의 말씀을 드리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며 "법과 원칙에 평생을 바쳐온 저로서는 자책감에 참으로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모든 허물, 모든 책임은 저에게 있다"고 토로했다.
또 "당을 위해 심부름한 죄밖에 없는 재정국장의 구속문제가 거론되는 상황을 보고 참담한 심정에 견딜 수가 없었다"면서 "감옥에 가더라도 제가 가야 마땅하다"며 고개를 떨구었다.
다소 초췌한 얼굴로 준비한 사과문을 읽어 내려간 이 전 총재는 "저에게 삶의 꿈을, 삶의 희망을 걸었던 많은 국민들에게 좌절과 실망을 안겨드린 제가 어떻게 해야 속죄를 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이 전 총재는 지난 97년 대선 당시 검찰이 김대중 후보의 비자금 수사를 포기하자 강력히 반발, 같은 당 소속이던 김영삼 대통령에게 탈당을 요구하는 등 정치자금의 결백성을 유독 강조해온 터였다.
특히 SK 돈 100억원 유입이 사실로 확인된 뒤 당 재정위원장이던 최돈웅 의원, 당시 사무총장이었던 김영일 의원, 최병렬 대표 등 모두가 이 전 총재의 개입 내지 사전 인지 가능성을 차단해 왔으나 정작 자신은 엄청난 책임감과 압력에 시달려온 것으로 전해졌다. 한 측근은 "잠을 못 이룰 정도로 괴로워했다"고 전했다.
또 당내 소장파들은 물론 박찬종 상임고문까지 나서 이 전 총재의 결자해지(結者解之)를 촉구한 것이 그의 '결심'에 영향을 미쳤다는 후문이다.
홍준표 당 전략기획위원장은 지난 28일 "이회창 후보 대선자금은 열린우리당이 별도의 특별검사를 추천해 수사하도록 하자"고 해 이 전 총재측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또 김문수 대외인사영입위원장도 "현 시점에서 누구의 방패가 돼야 한다는 생각은 공멸의 길"이라며 "이 전 총재라고 특별히 봐주고 말고 할 것이 없다"고 정공법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번 대국민사과로 이 전 총재는 도덕적인 치명타를 입게 된 것은 물론,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당 일각에서 추진된 정계 복귀문제도 일단락될 것으로 보인다.
대선 패배 직후 '아름다운 은퇴' 선언이 SK 비자금 사태로 '영원히 퇴장' 해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이다.
또 한나라당내에 여전히 실체로 남아 있던 '이회창 구심점'이 사라지게 돼 이 공백을 메우려는 경쟁도 가열돼 당내 역학구도변화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전 총재의 그늘에 가려 소수파 대표로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최 대표 역시 이 전 총재에 대한 부담을 털고 비자금 사태를 극복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전 총재의 대국민사과가 대선자금 문제의 초점을 어느 방향으로 옮겨놓을지는 미지수다.
김태완기자 kimchi@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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